[에세이] 원룸에 살아도 지적 재산은 있어서

in Korea • 한국 • KR • KO2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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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룸에 살아도 지적 재산은 있어서

요아(@hyunyoa)




낡은 원룸에 산다고 말하는 일이 부끄러워지지 않게 된 이유는 상경한 친구들 모두가 원룸에 살아서는 아니었다. 집값의 반 이상을 대출하는 일이 당연하게 취급되는 세상에 지내서도 아니었다. 집보다 중요한 지식의 가치를 알아차린 이후였다. 틈날 때마다 부동산 앱을 켜 시세를 알아보거나, 친구의 집들이에서 조심스레 보증금과 월세를 가늠하는 일도 드디어 그만뒀다. 비로소 민달팽이 증후군에서 해방된 것이다.

민달팽이 증후군은, 내가 지은 이름이니 사실 검색해도 나오지 않을 게 분명하다. 월세를 전전하는 민달팽이 신세의 자취생들이 틈만 나면 부동산 앱을 들락거리고 온갖 대출 정보를 꿰다가, 이젠 지역과 집 내부만 사진으로 봐도 대략적인 집값을 얘기하는 경지에 이른 현상에 이름을 붙였다. 이 민달팽이 증후군의 최대 약점은 모든 가치를 집으로 바꾸어 버린다는 거다. 최대치의 행복을 집으로 생각하게 된다. 언젠가 월세를 내지 않는 어른이 된다면 그거야말로 궁극적인 행복이라 생각하게 된다. 그런데 집을 사기 위한 유일한 수단은 돈이므로 돈을 벌지 못하는 시기에는 자괴감이 깊어진다. 얼른 돈을 벌어야 내 집 장만과 더 가까워질 텐데, 나는 지금 무얼 하느라 이렇게 빈둥대나 싶다. 하지만 침대에 누워 주택 청약 공고를 보는 게 책을 읽는 것보다 더 당연해졌을 때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확신했다. 그때는 낯선 사람과 수다를 떠는 일이 영양가 없게 느껴졌다. 시급이 높은 사람일수록 배울 점이 많다고 인정하던 때기도 했다. 취업사관학교가 된 대학교를 비판하던 내가, 쉽게 학점을 따는 수업보다는 어렵고 지난한 강의를 골랐던 내가 고작 집 하나로 이 꼴이 났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부동산 어플은 지울지 말지 망설였으니 이런 내 모습이 슬프고 웃겼다.

책을 쓰겠다고 떵떵거리면서도 정작 책을 사는 일에는 인색했다. 간혹 사지 않고서는 못 배기겠다는 책을 만나도 저렴하게 사겠다며 온라인을 골랐다. 매달 돈이 나가는 게 아까워 스트리밍도 끊지 못했고 영화를 사랑하면서도 요즘 영화는 재미없다고 합리화하며 왓챠를 포기했다. 당연히 팍팍해질 수밖에. 돈, 돈, 돈, 집, 집, 집. 반차를 쓰기 아까워했고 시급 없는 시간이 아까웠다. 그놈의 효율을 추구하느라 삶의 효율이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지하철에서 주식 차트를 보다 말고 에세이를 읽었다. 글자가 들어오지 않는 날에는 가만히 멍을 때렸다. 평소 같으면 지금 마케팅 지식 하나를 더 외우고 페이스북 광고 관리자 앱을 켜서 효율을 조정하는 게 내 연봉을 높이는 유일한 방안이라며 조마조마했을 테다. 광고 단가의 목표가 떨어질 때는 곧 잘리고 말 것이라며 마음을 채찍질하던 때도 있었다. 이런 게 어른의 삶이구나, 이런 게 직장인의 삶이야, 라며 수긍했다. 하지만 무기력증 극복과 관련한 온갖 영상이 추천 피드에 뜨자 그만두기로 했다. 아플 땐 쉬었다. 반차를 쓸 때도 아까워하지 않았다. 휴일을 알차게 쓰겠다며 시간별로 일정을 짜는 일도 그만뒀다. 물론 일해야 할 때는 열심히 일했지만, 퇴근하면 그만뒀다. 대신 사람들과 연락을 아주 많이 했다. 내 목표만 좇던 걸 멈추고 지인들은 요즘 무엇에 열중인지 알아봤다. 그들이 하는 프로젝트나 별 다섯 개를 남긴 영화들을 찾아보기도 했다. 한 달에 최소 십만 원은 콘텐츠비가 들었지만 그리 아깝지 않았다. 이미 충분히 절약하고 있는데도 여기서 허리띠를 더 졸라매면 퍽퍽한 사람이 된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아서였다.

미셸 공드리의 드라마 키딩에서는 이런 장면이 나온다.

한 부부가 이혼하는 자리, 금전 재산만 나누면 끝이구나 싶을 때 슬금슬금 등장하는 스케치북. 곧 스케치북 한 장마다 금액이 측정된다. 이제는 어엿한 유명 캐릭터들의 초안이 아내의 머리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시무룩 바게트는 오천만 원, 우주 수달은 삼천만 원! 비록 드라마 더래도 지적 결과물에 돈이 따라붙는 장면에서 확신이 들었다. 그래, 재미가 초안이면 돈은 퇴고본이야. 지금 당장 버는 돈이 없더라도 시무룩하지 말고 나중에 버는 돈이 없더라도 시무룩하지 말자. 성공하기 위해 성공을 좇으면 성공이 되지 않으니까, 비웃음 받는 일을 성공의 지표로 좇으면 되고 말고. 안 되더라도 최소 뿌듯함은 따라올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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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격증부터 점수까지, 이렇다 할 결과물은 없지만 되레 그 성과에서 벗어나니 풍요로워졌다. 말을 할 때도 자신감이 따라붙었다. 콘텐츠라는 물증을 톡톡히 챙긴 덕이었다. 자신감이 따라붙으니 누군가 나를 싫어해도 덜 신경쓰게 되었고, 그게 설령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었더래도 예전보다는 편하게 마음을 다스릴 수 있었다. 평소라면 내가 도대체 뭐라고 병에 걸려 용기내지 못했던 일들을 시작했다. 대관비만 받고 소박하게 에세이 클래스를 열어봤다. 망할 줄 알았는데 세명이 와주었고, 그 다음은 다섯명. 이제는 열세명까지 앞두고 있으니 신기한 일이다. 나는 토익이 없어 졸업도 못하는 수료생인데. 돈도 없어 90퍼센트의 대출금을 끼고 사는 중인데. 학벌도 좋지 않은데. 학점이 낮아 교직 이수도 못 했는데……. 에이, 그럼 뭐 어때. 헐값에 티켓을 구하느라 옷으로 배우를 구분했지만 연극도 많이 봤고, 알바비로 전시도 많이 봤어, 영화도 많이 봤고, 책도 많이 읽었어. 서울 올라와서는 온갖 사람들이랑 부딪치기도 많이 했는데. 이 모든 게 단순히 돈을 쓰는 일이라서 무시받기에는 적어도 내게는 값진 경험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내 지식과 경험을 듣고 싶다며 사람들이 조금씩 찾아주고 있으니 두려우면서도 두근거리는 일이다.

이왕 받는 비웃음, 조금 더 받아버리지 뭐.

잘 다니던 회사에 퇴사를 선언했고, 한달 간 충청남도에 내려가 시골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돌봄 교육 봉사활동을 신청했다. 아이들이 혼자서도 마음을 잘 다스리게 될 일기를 쓰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바로 돈이 나오는 일이 아니더라도, 그래서 집 장만이라는 꿈과 서서히 멀어지더라도 이만하면 되었다. 좋아하는 일을 하며 돈을 벌 수 있다는 유니콘을 타기 위해 무지개 다리를 찾아 떠나는 중이다. 집이 없어도 초라하지 않은 사람이 되면 뜻하지 않게 집이 따라올 수도 있지 않으려나. 나는 장장 25년을 지구에 불시착했다고 생각했고, 아기돼지 삼 형제가 부러워하는 튼튼한 집만 생기면 해결될 거라 믿었으나 점차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닫고 있다. 지적 재산을 모으는 데 힘을 기울이면, 세상에 홀로 떨어진 느낌도 사라지리라는 가설에 확신이 더해지기 때문이다.


목표

예전 :
서울에 투룸이 있는 사람

지금:
지난 글이 모두 담긴 노트북을 잃어버려도 머리에 다 있다며 괜찮다고 말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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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살아서 세상에 홀로 떨어진 느낌이 사라진다면 엄청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했는데도 사라지지 않을 때는 정말 절망스럽더군요.

 2 months ago 

안녕하세요 소수점님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 아직은 퇴사 4일차라 그런지 제 결정에 만족스럽지만 만약 이 결정이 잘못되었다는 걸 느낀다면 말씀해주셨듯 절망스러울 것 같아요 ㅜㅠ 그럼에도 제 삶의 선택권은 제게 있으니..!

태풍에 코로나까지 바람 잘 날 없는 요즘입니다. 건강 유의하시고 힘내세요!

공격적이게 들리실 수 있었을텐데 친절하게 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건강하세요. 코로나는 변종이 되어서 이제 거의 위험하지 않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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