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정전의 재발견

in #kr-daily3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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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전의 재발견


만 하루가 넘는 시간(약 28시간 정도) 동안의 정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다. 지난번에는 정전으로 인한 고충에 대해 썼는데, 오늘은 정전으로 인해 생긴 의외로 좋았던 점에 대해 말해보고자 한다.


냄비밥


전기가 끊겼으니, 당연히 전기밥솥은 무용지물이 됐다. 그래도 다행히 가스는 들어오니까 뭐라도 해먹을 수는 있었다. 첫끼는 스파게티를 해먹었다. 면만 삶으면 되니까. 그런데 정전이 며칠이나 이어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매끼니마다 스파게티를 해먹을 수는 없었다. 애들만 아니었으면 그냥 라면을 끓여먹었겠지만, 애들에게 몇 끼니 연속으로 면만 먹일 수는 없었다.

그래, 냄비밥을 하자. 야외에 놀러가면 다들 냄비밥을 해먹지 않던가? <삼시세끼 어촌편>을 보니 손호준도 냄비밥을 잘 해먹던데.

나는 어릴 적 엄마 어깨 너머로 봤었던 기억, 중학교 가정 교과서에서 배웠던 내용, 몇년 전 정전이 됐을 때 시도했었던 경험 등을 모두 머리 속에 떠올리며 쌀을 씻고 신중히 냄비에 물을 재기 시작했다. 손등까지 물을 넣고 불에 올린다. 끓는 소리가 나면 불을 줄인다. 줄인 채로 십분 정도 더 끓인 다음 아주 약불로 불을 더 줄여 뜸을 들인다.

사실 기대 반 걱정 반이었는데, 예상 외로 밥은 꽤나 맛있게 잘 됐다. 바닥에 누룽지도 나름 선방했고. 이거 해볼만 하겠는데 싶었다.

전에는 정전이 되면 햇반을 사다 먹거나, 라면을 끓여 먹었는데, 이제는 냄비밥을 해먹어봐야겠다.


킨들


전기가 없으니 날이 어두워지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전기 없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책을 읽는 것뿐인데, 해가 완전히 진 저녁은 말할 것도 없고, 구름이 잔뜩 껴서 어둑어둑한 낮에도 책을 읽기는 힘들었다. 그런데 의외로 킨들이 꽤 유용했다.

킨들은 다른 기능 없이 책만 볼 수 있기 때문에 배터리가 아주 오래갔다. 몇 시간이고 맘놓고 펼쳐놓을 수 있었다. 더군다나 킨들 자체에 배경 라이트가 켜지기 때문에 (마치 어두운 데서도 핸드폰을 할 수 있는 것처럼) 어두운 곳에서도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정전이 됐지만 책을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이 참 든든했다.

물론 아무리 자체 불빛이 있다고 해도 어두운데서 오래 책을 읽으면 눈이 아프니까 긴 시간 읽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책을 읽을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참 기분 좋았다.


모노폴리


어른들은 어찌어찌 정전을 참아낸다 해도 아이들은 어떻게 한다? 컴퓨터도 인터넷도 안되는데 뭘하고 놀아줘야 할까? 하지만 이 모든 건 기우였다. 아이들은 역시 알아서 자기들이 놀 거리를 찾아냈다.

구석에 있던 모노폴리 게임을 찾아내서 열심히 주사위 굴려가며 놀이를 한 것이다. 해가 어둑어둑해져서 '커뮤니티 체스트'나 '찬스' 카드에 적힌 글을 읽기 힘들어질 때까지, 아이들은 재미있게 몇 시간이고 놀이를 했다.

역시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고, 전기가 끊겨도 놀 거리는 무궁무진했다.

지난 주말에는 전기가 들어온 이후에도, 내친 김에 온가족이 모노폴리 놀이를 했다. 간만에 핸드폰을 내려놓고 주사위를 손에 들었다. 모두가 함께 하니 더 재미있는 시간이었다. 앞으로도 가끔은 전기가 나가지 않더라도 온가족이 함께 놀 수 있는 이런 시간을 가져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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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의 힘! 입니다~^^

네. 긍정적으로 생각하니 짜증도 덜 나고 좋았어요. ^^

와우 TV 대신에 가족들의 즐거운 오락시간이 늘어났군요!

네. 정전의 순기능이었어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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