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군 선제타격계획에 대한 분석과 해석(8)

in #krlast month

북한군이 서울 점령 즉시 또는 사전 침투한 부대가 한강교를 점령했다면 한강 이북에 있는 국군의 퇴로를 차단하여 섬멸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고 이후 작전도 역동적으로 전개될 수 있었을 것이다.

||북한군이 6월 28일 새벽 미아리 방어선을 돌파 후 한강교가 폭파되기 전에 점령할 수 있었느냐는 더 논의가 필요한 사항이다. 국군은 6.25 초기 전투에서 임진강교와 모진교를 폭파하지 못함으로 인한 전술적 과오를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6월 26일부터 한강교 폭파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렇다하더 라도 북한군이 서울 진입 즉시 한강교 점령을 시도 했다면 전쟁 양상은 다르게 전개되었을 것이다. 당시 한강교는 한강대교(인도교), 경부 복선화 철교, 경인 상하행선 철교, 광진교(인도교) 총 5개의 교량이 있었다. 그 중 02시 30분에 한강 인도교와 한강 철교가 폭파되었고, 04시경에 광진교가 폭파되었다. 그러나 2개의 철교는 완전히 폭파되지 않아 후에 복구되어 북한군 전차의 도강을 허용했다.||

북한군의 적시적인 한강교 점령 실패는 전술적으로는 밀어내기식 공격을 수행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 조성되었고 전략적으로는 국군이 한강방어선을 형성할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하였다. 만약 한강교가 폭파되었다 할지라도 국군이 한강방어선을 형성하기 전에 즉시 교두보를 확보했다면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한강 방어선 형성은 어려웠을 것이다. 이후 국군은 전투력을 정비하여 5일 동안 한강선을 방어함으로써 미군과 유엔군이 참전 및 전개할 시공간적 여건을 조성했다.
김일성은 28일 11시 30분에 서울 점령을 공식 선언하였으나 한강을 건너 국군을 추격하는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무질서하게 패퇴하는 국군을 추격하지 않고 서울 점령을 자축하며 6월 29일까지 부대들은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6월 29일 17시 30분 미 극동 공군에 의해 평양이 폭격을 당하자 주 북한 소련대사는 김일성에게 남진을 재촉했다.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 후 국군에 대한 추격을 중단하자 스탈린도 매우 의아하게 생각했다.
김일성은 주 북한 소련대사와 군사고문단의 조언으로 6월 30일 아침부터 한강을 극복하기 위한 본격적인 행동에 나섰다. 전쟁초기에 북한군의 이와 같은 시간 지체는 전쟁의 양상을 바꾸기에 충분했다.
이와 같이 김일성이 서울 점령 즉시 한강을 건너 국군을 추격하는 것을 중지한 결정에 대해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할 부분이 많다. 이와 관련하여 많은 군사전문가들이 분석하고 평가한 자료를 내놓았다. 그러나 이와 관련한 1차사료가 부족하여 다양한 주장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이와 같은 상황을 클라우제비츠의 언명의 틀로 해석한다면 김일성이 정치목적과 군사목표 간의 관계와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방증으로 볼 수 있다.

Coin Marketplace

STEEM 0.15
TRX 0.03
JST 0.025
BTC 12156.53
ETH 378.09
USDT 1.00
SBD 0.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