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우천왕의 부활, 테라 전난영, 환인, 환웅, 마고, 단군, 상고사, 길가메시, 인안나, 이쉬타르, 마고여신, 탁록, 황제와 싸움, 지남거, 관자오행편, 동이족, 산해경, 진시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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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우천왕의 부활, 테라 전난영, 환인, 환웅, 마고, 단군, 상고사, 길가메시, 인안나, 이쉬타르, 마고여신, 탁록, 황제와 싸움, 지남거, 관자오행편, 동이족, 산해경, 진시황

치우는 신화적으로 오랫동안 요괴, 마물 또는 괴물로 취급되었다. 치우 신앙은 분명 존재하였고 많은 중국의 군주들도 전쟁에서의 승리를 그에게 기원했지만, 민간 설화에서는 별놈의 것들에게 다 얻어터지는 등, 시대마다 기록마다 그 위상이 천차만별이었다. 천자의 재상, 대제후, 섭정과 서자 떨거지, 요괴, 재앙신의 갭은 엄청나지 않은가.

한고조 유방도 치우에게 제사를 지내고 전쟁의 승리를 기원하는 등 군신으로서 치우 자체에 대한 신앙은 면면히 존재해 왔다. 하지만 민간에서의 치우는 그냥 태고적의 대악당으로서 원나라 시대의 잡극인 관운장대파치우(關雲長大破蚩尤, 관우가 치우를 개박살내다) 등에서 보면 옥천산에 머무르던 관우의 혼령에게 떡실신 당하고 개처럼 끌려다니는 등 수없이 많은 안습의 팔자를 걷고 있다. 다만 이는 지역마다 달라서, 치우신앙이 시작된 중국 동북지방에서는 상당히 대우가 좋았다. 진나라 때 진시황에게 접근한 방사들이 숭상을 권한 팔신[1]중에 치우가 있으며, 현재도 중국 동북지역 일부에서는 민간에서 용신이자 우신으로 숭배된다.[2] 실제로 한나라가 중국을 지배하기 전에는 중국에서도 지역/국가 별로 민간 신앙의 차이가 컸으나, 한나라를 시작으로 점차 각지의 민간 신앙이나 흡수한 나라의 관변 신앙을 정리하고 유학을 장려하면서 변하기 시작했다. 본래 중국의 창세신급 여신이던 여와가 복희의 여동생으로 격하되는 신화도 한나라 때부터 등장한다.

치우는 팔 6개에 눈 4개가 달리고, 소의 뿔과 발굽, 구리로 된 머리와 쇠로 된 이마(동두철액)가 있었으며, 맨몸으로 맹수와도 대적할 수 있을 만큼 힘도 굉장히 강했다고 한다. 그 때문에 당시의 조악한 기술로서는 어찌 할 도리가 없었으며, 안개 도술까지 구사할 수 있어 어디서 어떻게 나타날지 알 수 없으니 결국 그 누구도 대적할 수 없었다. 이것을 묘사하기를 동두철액이라고 한다. ≪치우, 오래된 역사병≫(2017, 푸른역사)을 쓴 김인희 박사의 말에 따르면 이런 치우(蚩尤)란 뱀이 많은 중국 남쪽 장강(長江) 일대 지배 세력을 상징한다. 갑골문을 보면 치(蚩)란 뱀을 밟은 불길함을, 우(尤)는 고기를 독점하는 탐욕을 상징한다. 황제로 대표되는 황하 세력이 보기에 장강에 사는 놈들이 몹시 마음에 안 들었다는 의미다. 거기다 장강 일대는 구리가 풍부해 청동기가 빼어났다. "구리로 된 이마"를 지닌 치우가 기주, 혹은 탁록에서 황제와 한판 승부를 벌였다는 얘기도 거기서 나온다.

한편 형제 81인 또는 72인과 풍백, 우사를 거느리고 다녔다고도 한다. 문제는 단군신화에 풍백, 우사, 운사가 거론되는 덕에 환단고기를 지을 때 짜맞춰넣을 여지가 생겼다는 점. 그 외에 다섯 병기를 만들어 팔 6개로 들고 다녔다고도 하는데, 이 다섯 병기가 무엇인지도 기록마다 다 다르다. [3]

역사적 실존인물이라는 주장이 있으나 신뢰성 있는 근거는 희박하다. 중국에서는 중화삼조라며 역사적 인물처럼 인정하지만 애초에 그건 소수민족 융합 차원, 다시 말해 '중국인'을 만들기 위한 작업에 불과하며 치우의 실존을 주장할 만한 근거는 사마천의 사기뿐, 물증은 하나도 없으며, 사마천 본인도 예전부터 내려온 이야기라는 것 말고는 역사라는 근거를 전혀 대지 않는다.[4] 중화삼조 운운한 뒤부터는 드라마 같은 데에서 살아서 헌원에게 복속한 걸로 나오기도 한다.

과거에는 유성우를 치우기(蚩尤旗, 치우의 깃발)라고 불렀다.

  1. 문헌 속 치우[편집]
    김인희 박사의 말에 따르면 재앙을 상징하는 '치(蚩)'자와 욕심을 상징하는 '우(尤)'자를 결합하여 ‘치우’라는 말이 등장하는 것은 서주(西周)시대에 이르러서인데, 이는 서주시대에 치우집단이 세력을 형성하고 역사무대에 등장했음을 뜻한다. 치우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상서의 주서(周書) 여형(呂刑)편에 실려 있는데, 여형(呂刑)을 제정하면서 악독한 형벌의 기원을 설명하는 과정에 등장한다. 서주는 무기와 예기를 제작하는 데 필수품인 청동 원료를 확보하고, 제후로서 예를 다하지 않는 초나라를 덕을 실행한다는 명목으로 정벌했는데 이러한 내용이 '여형'편에 황제가 치우를 정벌한 이야기로 기록된 것이다. 많은 학자들은 치우 현상에 대해 한족 왕조가 정통이란 관념의 산물이라 생각한다. 황제는 최고의 권위를 가지고 있으며 황제와 염제는 화하의 정통으로 숭배된다. 치우가 탁록에서 전쟁을 한 것은 정의가 사악함을 징벌한 것으로 인(仁)과 덕(德)이 폭력을 이긴 것을 말한다. 치우는 탐욕스럽고 난을 일으키며 정벌해도 죄가 되지 않으며 죽여도 되는 폭도라고 간주된다.

이러한 외모와 산해경에서 표현된 원전 신화에서의 미칠 듯한 강력함, 그리고 비와 바람을 다스렸느니 하는데다 대척점에 있는 황제가 하필 가뭄을 사용하는 것 때문에 일부는 치우가 신농의 기믹을 이어받은 동부 평야의 풍요와 문명의 신이며 황제는 그에 대항해 나타난 서부 황야의 무법자(?)라는 주장도 있다. 참고로 말하자면, 묘족의 전승에 따르면 당시 동부 평야는 묘족이 주름잡고 있었는데 한족들이 그들을 밀어냈단다…. 근데 헌원이 가뭄을 상징한다면 풍백, 우사 앞에선 떼꿀멍이긴 해도 비를 내리게 하는 응룡이 황제편인게 납득이 되지 않는다.

치우라는 이름은 산해경에서도 나오는데[5], 산해경은 선진시대인 전국시대에 쓰인 것으로 추정된다. 치우가 정말 고대의 실존인물이었다면 수없이 발견된 은나라의 갑골문자에는 왜 전혀 나오지 않는지 전혀 설명하지 못한다. 한약재로 써버려서 그렇다[6] 설마 모를까 싶지만, 사마천의 사기가 쓰인 전한은 전국시대보다 한참 뒤의 시대다. 즉, 신화 속의 존재일 확률이 매우 높고 실존인물이라는 증거는 전혀 없다. 치우의 무덤이라 전해는 곳들도 그냥 그렇다는 구전이 내려올 뿐, 유물이나 기록 같은 제대로 된 근거가 없다.

전승에 따르면, 당시 그의 군대는 발전된 병기제작 기술과 치우의 영도력에 의거 수많은 세력을 패퇴시키고 그 판도를 넓혀갔다. 그리고 그 뒤 신농씨(神農氏)와의 주도권 싸움에서 승리한 신흥세력 황제(黃帝)와 격돌하게 되는데, 여기까지는 중국 신화와 한국 유사역사학에서 별 이견이 없지만 그 뒤의 기록부터 상당 부분 달라진다.

응룡이나 황제가 죽였다는 쪽이 메이저지만, 마이너하게는 살아서 고향으로 도망쳤다거나 헌원의 신하가 됐다고 나오기도 한다. 치우가 죽었다는 설을 따르지만 '치우가 죽은 후 요마들이 날뛰니 치우의 얼굴을 그려 붙여 그가 살아서 헌원의 신하가 된 것처럼 위장하자 조용해졌다'고 나오는 신화도 있는데, 사망설과 생존설의 융합을 꾀한 것으로 보인다.

치우와 황제의 마지막 싸움은 탁록(학술적으로 위치 불명)에서 있었고, 그 때 황제는 지남거(指南車, 항상 남쪽을 가리키는 일종의 나침반)를 만들어 안개 속에서도 방향을 잡을 수 있게 되었고, 결국 응룡(應龍)과 자신의 딸인 태양을 다스리는 여신 발(妭)[7]까지 총동원하여 그를 쓰러뜨렸다고 전한다. 묘족 신화에서는 발의 미인계에 의해 당했다고 나온다. 근데 중국 신화에서 묘사되는 발은 대머리인데? 대머리를 좋아할 수도 있지. 그리고 황제에 의해 토막나서 처형당하는데, 이때 흘린 피가 단풍나무에 스며들어 가을마다 단풍이 붉게 물든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다만 같은 산해경에서 단풍나무 전설 기록에 보면 치우가 자신을 포박한 차꼬와 수갑을 풀어 버리고 도망쳤는데 그것이 변한 게 단풍나무라는 이설도 나온다. 애초에 산해경은 역사서가 아니라 후대에 수없이 덧씌워진 신화집이라 모순되는 내용이나 현실과 괴리된 내용이 굉장히 많다.

관자 오행편에 보면 황제 헌원이 치우를 得(득, 만나다/얻다로 둘 다 해석 가능)하여 천도를 훤히 알게 되었다는 기록도 나오지만, 염제의 자손인 치우 본인이라기보다는 유성을 의인화한 별개의 인물로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금속기 주조나 기상현상의 통제와 같은 면모가 없고, 대신 천도를 아는 현자라서 황제가 관직을 내린 것으로 나온다. 일단 황제와 싸운 그 치우가 아니라는 주석이 달려 있지만 본문이 아니라 주석이므로 권위가 떨어지며, 함께 병렬로 언급된 다른 재상들 중 다른 중국 신화의 신들이 있고, 중국 신화에 나오는 치우가 한 명 밖에 없기 때문에, 이 치우와 저 치우를 동일 인물로 여기는 경향이 예전부터 있어 왔다. 한편 지수 편에서는 천자가 치우에게 광산을 관리하게 시켰다가 치우가 무기를 만들어 다른 제후국들을 겸병하고 다니다가 천자에게 털린 것, 즉 잘 알려진 탁록전쟁과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렇게 한 전집 내에서도 기록에 차이가 있는 이유는 관자가 여러 명의 저자와 편집자의 손을 거쳐 완성됐기 때문이다.

  1. 치우 신앙[편집]
    일부 사람들이 한민족의 조상신이라고 우겨대지만, 사실 한국과는 관계가 없고 그보다는 묘족의 조상신이라는 설이 더 유력하며, 중국 동부 황하 하류 지역의 민간 신앙에서 많이 받들어지는 신이기도 하다. 묘족 역시 원래 양쯔강 이북에 거주하다가 후대에 남하했다고 한다. 현 중국에서는 소수민족 융합 차원에서 치우 또한 '중화삼조'라고 해서, 황제 헌원과 염제, 치우를 중화민족(한족과 다른 개념)의 조상으로 인정한다. 하지만 중국에서도 신화시대를 다룬 드라마에서도 흔히 치우를 비열하고 사악한 악당으로 묘사하는 통에 묘족 출신 지식인들이 '중화삼조의 한 분을 이렇게 묘사하다니!' 하고 발끈하곤 한다. 병 주고 약 주네

치우를 숭상하는 묘족들조차도 치우가 황제에게 깨졌다는 것 자체는 인정하는것 같다. 묘족 신화에서 치우는 헌원에게 패한 이후 본거지인 동북부로 돌아가 자식들 중 하나에게 남쪽으로 내려가 나라를 세우라 하고, 그 자식이 남하하여 나라를 세우는 게 그게 묘족의 시조가 된다.(김선자 저, 중국 소수민족신화기행) 근데 이 과정에서 황제 헌원의 제재는 전혀 없다. 아예 등장이 없다. 역시 헌원은 진 게 맞는 것 같다 는 농담이고, 그쪽까지 힘을 실을 여력이 없었다고 보는게 무방할 듯. 다른 지역을 마저 정복하느라 바빴다고 나오며, 헌원이 아내를 넷이나 둔 이유가 일거리가 폭주해 사무를 시키려고였다는 기록까지도 있다. 고대 중국의 관중은 물론이고 당대까지의 장안과도 꽤 떨어진 지역이니 하나라 이전이면 더욱 외지였을 것이다.

단 ≪치우, 오래된 역사병≫(2017, 푸른역사)을 쓴 김인희 박사는 저서에서 치우가 한민족의 조상신은 물론이고, 심지어 묘족의 조상신조차 '아니다'라고 주장하였다. 저자가 실제로 묘족을 찾아가 인터뷰해보면, 지식인 계층에서나 치우를 알 뿐, 근대적 교육을 받지 못한 일반인들은 모른다고 하였다. 그런데 묘족의 지식인들이 민족주의적 감정으로, 한족과 대립되는 위대한 조상을 만들고자 치우 신화를 끌어들이고, 묘족의 전설이나 옛 이야기들 중 '치우'와 이름이 조금이라도 유사한 인물이 등장한다 싶으면 전부 치우와 연결지어 역사를 꾸며내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김 박사의 저서를 따르면, 묘족의 '치우 신화'라는 것도 곧이 믿을 수가 없다. 물론 일반인 계층에선 이미 신앙이 사멸했을 뿐[8] 조상신으로 섬겨진 역사가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치우천왕 나무위키 출처치우는 신화적으로 오랫동안 요괴, 마물 또는 괴물로 취급되었다. 치우 신앙은 분명 존재하였고 많은 중국의 군주들도 전쟁에서의 승리를 그에게 기원했지만, 민간 설화에서는 별놈의 것들에게 다 얻어터지는 등, 시대마다 기록마다 그 위상이 천차만별이었다. 천자의 재상, 대제후, 섭정과 서자 떨거지, 요괴, 재앙신의 갭은 엄청나지 않은가.

한고조 유방도 치우에게 제사를 지내고 전쟁의 승리를 기원하는 등 군신으로서 치우 자체에 대한 신앙은 면면히 존재해 왔다. 하지만 민간에서의 치우는 그냥 태고적의 대악당으로서 원나라 시대의 잡극인 관운장대파치우(關雲長大破蚩尤, 관우가 치우를 개박살내다) 등에서 보면 옥천산에 머무르던 관우의 혼령에게 떡실신 당하고 개처럼 끌려다니는 등 수없이 많은 안습의 팔자를 걷고 있다. 다만 이는 지역마다 달라서, 치우신앙이 시작된 중국 동북지방에서는 상당히 대우가 좋았다. 진나라 때 진시황에게 접근한 방사들이 숭상을 권한 팔신[1]중에 치우가 있으며, 현재도 중국 동북지역 일부에서는 민간에서 용신이자 우신으로 숭배된다.[2] 실제로 한나라가 중국을 지배하기 전에는 중국에서도 지역/국가 별로 민간 신앙의 차이가 컸으나, 한나라를 시작으로 점차 각지의 민간 신앙이나 흡수한 나라의 관변 신앙을 정리하고 유학을 장려하면서 변하기 시작했다. 본래 중국의 창세신급 여신이던 여와가 복희의 여동생으로 격하되는 신화도 한나라 때부터 등장한다.

치우는 팔 6개에 눈 4개가 달리고, 소의 뿔과 발굽, 구리로 된 머리와 쇠로 된 이마(동두철액)가 있었으며, 맨몸으로 맹수와도 대적할 수 있을 만큼 힘도 굉장히 강했다고 한다. 그 때문에 당시의 조악한 기술로서는 어찌 할 도리가 없었으며, 안개 도술까지 구사할 수 있어 어디서 어떻게 나타날지 알 수 없으니 결국 그 누구도 대적할 수 없었다. 이것을 묘사하기를 동두철액이라고 한다. ≪치우, 오래된 역사병≫(2017, 푸른역사)을 쓴 김인희 박사의 말에 따르면 이런 치우(蚩尤)란 뱀이 많은 중국 남쪽 장강(長江) 일대 지배 세력을 상징한다. 갑골문을 보면 치(蚩)란 뱀을 밟은 불길함을, 우(尤)는 고기를 독점하는 탐욕을 상징한다. 황제로 대표되는 황하 세력이 보기에 장강에 사는 놈들이 몹시 마음에 안 들었다는 의미다. 거기다 장강 일대는 구리가 풍부해 청동기가 빼어났다. "구리로 된 이마"를 지닌 치우가 기주, 혹은 탁록에서 황제와 한판 승부를 벌였다는 얘기도 거기서 나온다.

한편 형제 81인 또는 72인과 풍백, 우사를 거느리고 다녔다고도 한다. 문제는 단군신화에 풍백, 우사, 운사가 거론되는 덕에 환단고기를 지을 때 짜맞춰넣을 여지가 생겼다는 점. 그 외에 다섯 병기를 만들어 팔 6개로 들고 다녔다고도 하는데, 이 다섯 병기가 무엇인지도 기록마다 다 다르다. [3]

역사적 실존인물이라는 주장이 있으나 신뢰성 있는 근거는 희박하다. 중국에서는 중화삼조라며 역사적 인물처럼 인정하지만 애초에 그건 소수민족 융합 차원, 다시 말해 '중국인'을 만들기 위한 작업에 불과하며 치우의 실존을 주장할 만한 근거는 사마천의 사기뿐, 물증은 하나도 없으며, 사마천 본인도 예전부터 내려온 이야기라는 것 말고는 역사라는 근거를 전혀 대지 않는다.[4] 중화삼조 운운한 뒤부터는 드라마 같은 데에서 살아서 헌원에게 복속한 걸로 나오기도 한다.

과거에는 유성우를 치우기(蚩尤旗, 치우의 깃발)라고 불렀다.

  1. 문헌 속 치우[편집]
    김인희 박사의 말에 따르면 재앙을 상징하는 '치(蚩)'자와 욕심을 상징하는 '우(尤)'자를 결합하여 ‘치우’라는 말이 등장하는 것은 서주(西周)시대에 이르러서인데, 이는 서주시대에 치우집단이 세력을 형성하고 역사무대에 등장했음을 뜻한다. 치우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상서의 주서(周書) 여형(呂刑)편에 실려 있는데, 여형(呂刑)을 제정하면서 악독한 형벌의 기원을 설명하는 과정에 등장한다. 서주는 무기와 예기를 제작하는 데 필수품인 청동 원료를 확보하고, 제후로서 예를 다하지 않는 초나라를 덕을 실행한다는 명목으로 정벌했는데 이러한 내용이 '여형'편에 황제가 치우를 정벌한 이야기로 기록된 것이다. 많은 학자들은 치우 현상에 대해 한족 왕조가 정통이란 관념의 산물이라 생각한다. 황제는 최고의 권위를 가지고 있으며 황제와 염제는 화하의 정통으로 숭배된다. 치우가 탁록에서 전쟁을 한 것은 정의가 사악함을 징벌한 것으로 인(仁)과 덕(德)이 폭력을 이긴 것을 말한다. 치우는 탐욕스럽고 난을 일으키며 정벌해도 죄가 되지 않으며 죽여도 되는 폭도라고 간주된다.

이러한 외모와 산해경에서 표현된 원전 신화에서의 미칠 듯한 강력함, 그리고 비와 바람을 다스렸느니 하는데다 대척점에 있는 황제가 하필 가뭄을 사용하는 것 때문에 일부는 치우가 신농의 기믹을 이어받은 동부 평야의 풍요와 문명의 신이며 황제는 그에 대항해 나타난 서부 황야의 무법자(?)라는 주장도 있다. 참고로 말하자면, 묘족의 전승에 따르면 당시 동부 평야는 묘족이 주름잡고 있었는데 한족들이 그들을 밀어냈단다…. 근데 헌원이 가뭄을 상징한다면 풍백, 우사 앞에선 떼꿀멍이긴 해도 비를 내리게 하는 응룡이 황제편인게 납득이 되지 않는다.

치우라는 이름은 산해경에서도 나오는데[5], 산해경은 선진시대인 전국시대에 쓰인 것으로 추정된다. 치우가 정말 고대의 실존인물이었다면 수없이 발견된 은나라의 갑골문자에는 왜 전혀 나오지 않는지 전혀 설명하지 못한다. 한약재로 써버려서 그렇다[6] 설마 모를까 싶지만, 사마천의 사기가 쓰인 전한은 전국시대보다 한참 뒤의 시대다. 즉, 신화 속의 존재일 확률이 매우 높고 실존인물이라는 증거는 전혀 없다. 치우의 무덤이라 전해는 곳들도 그냥 그렇다는 구전이 내려올 뿐, 유물이나 기록 같은 제대로 된 근거가 없다.

전승에 따르면, 당시 그의 군대는 발전된 병기제작 기술과 치우의 영도력에 의거 수많은 세력을 패퇴시키고 그 판도를 넓혀갔다. 그리고 그 뒤 신농씨(神農氏)와의 주도권 싸움에서 승리한 신흥세력 황제(黃帝)와 격돌하게 되는데, 여기까지는 중국 신화와 한국 유사역사학에서 별 이견이 없지만 그 뒤의 기록부터 상당 부분 달라진다.

응룡이나 황제가 죽였다는 쪽이 메이저지만, 마이너하게는 살아서 고향으로 도망쳤다거나 헌원의 신하가 됐다고 나오기도 한다. 치우가 죽었다는 설을 따르지만 '치우가 죽은 후 요마들이 날뛰니 치우의 얼굴을 그려 붙여 그가 살아서 헌원의 신하가 된 것처럼 위장하자 조용해졌다'고 나오는 신화도 있는데, 사망설과 생존설의 융합을 꾀한 것으로 보인다.

치우와 황제의 마지막 싸움은 탁록(학술적으로 위치 불명)에서 있었고, 그 때 황제는 지남거(指南車, 항상 남쪽을 가리키는 일종의 나침반)를 만들어 안개 속에서도 방향을 잡을 수 있게 되었고, 결국 응룡(應龍)과 자신의 딸인 태양을 다스리는 여신 발(妭)[7]까지 총동원하여 그를 쓰러뜨렸다고 전한다. 묘족 신화에서는 발의 미인계에 의해 당했다고 나온다. 근데 중국 신화에서 묘사되는 발은 대머리인데? 대머리를 좋아할 수도 있지. 그리고 황제에 의해 토막나서 처형당하는데, 이때 흘린 피가 단풍나무에 스며들어 가을마다 단풍이 붉게 물든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다만 같은 산해경에서 단풍나무 전설 기록에 보면 치우가 자신을 포박한 차꼬와 수갑을 풀어 버리고 도망쳤는데 그것이 변한 게 단풍나무라는 이설도 나온다. 애초에 산해경은 역사서가 아니라 후대에 수없이 덧씌워진 신화집이라 모순되는 내용이나 현실과 괴리된 내용이 굉장히 많다.

관자 오행편에 보면 황제 헌원이 치우를 得(득, 만나다/얻다로 둘 다 해석 가능)하여 천도를 훤히 알게 되었다는 기록도 나오지만, 염제의 자손인 치우 본인이라기보다는 유성을 의인화한 별개의 인물로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금속기 주조나 기상현상의 통제와 같은 면모가 없고, 대신 천도를 아는 현자라서 황제가 관직을 내린 것으로 나온다. 일단 황제와 싸운 그 치우가 아니라는 주석이 달려 있지만 본문이 아니라 주석이므로 권위가 떨어지며, 함께 병렬로 언급된 다른 재상들 중 다른 중국 신화의 신들이 있고, 중국 신화에 나오는 치우가 한 명 밖에 없기 때문에, 이 치우와 저 치우를 동일 인물로 여기는 경향이 예전부터 있어 왔다. 한편 지수 편에서는 천자가 치우에게 광산을 관리하게 시켰다가 치우가 무기를 만들어 다른 제후국들을 겸병하고 다니다가 천자에게 털린 것, 즉 잘 알려진 탁록전쟁과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렇게 한 전집 내에서도 기록에 차이가 있는 이유는 관자가 여러 명의 저자와 편집자의 손을 거쳐 완성됐기 때문이다.

  1. 치우 신앙[편집]
    일부 사람들이 한민족의 조상신이라고 우겨대지만, 사실 한국과는 관계가 없고 그보다는 묘족의 조상신이라는 설이 더 유력하며, 중국 동부 황하 하류 지역의 민간 신앙에서 많이 받들어지는 신이기도 하다. 묘족 역시 원래 양쯔강 이북에 거주하다가 후대에 남하했다고 한다. 현 중국에서는 소수민족 융합 차원에서 치우 또한 '중화삼조'라고 해서, 황제 헌원과 염제, 치우를 중화민족(한족과 다른 개념)의 조상으로 인정한다. 하지만 중국에서도 신화시대를 다룬 드라마에서도 흔히 치우를 비열하고 사악한 악당으로 묘사하는 통에 묘족 출신 지식인들이 '중화삼조의 한 분을 이렇게 묘사하다니!' 하고 발끈하곤 한다. 병 주고 약 주네

치우를 숭상하는 묘족들조차도 치우가 황제에게 깨졌다는 것 자체는 인정하는것 같다. 묘족 신화에서 치우는 헌원에게 패한 이후 본거지인 동북부로 돌아가 자식들 중 하나에게 남쪽으로 내려가 나라를 세우라 하고, 그 자식이 남하하여 나라를 세우는 게 그게 묘족의 시조가 된다.(김선자 저, 중국 소수민족신화기행) 근데 이 과정에서 황제 헌원의 제재는 전혀 없다. 아예 등장이 없다. 역시 헌원은 진 게 맞는 것 같다 는 농담이고, 그쪽까지 힘을 실을 여력이 없었다고 보는게 무방할 듯. 다른 지역을 마저 정복하느라 바빴다고 나오며, 헌원이 아내를 넷이나 둔 이유가 일거리가 폭주해 사무를 시키려고였다는 기록까지도 있다. 고대 중국의 관중은 물론이고 당대까지의 장안과도 꽤 떨어진 지역이니 하나라 이전이면 더욱 외지였을 것이다.

단 ≪치우, 오래된 역사병≫(2017, 푸른역사)을 쓴 김인희 박사는 저서에서 치우가 한민족의 조상신은 물론이고, 심지어 묘족의 조상신조차 '아니다'라고 주장하였다. 저자가 실제로 묘족을 찾아가 인터뷰해보면, 지식인 계층에서나 치우를 알 뿐, 근대적 교육을 받지 못한 일반인들은 모른다고 하였다. 그런데 묘족의 지식인들이 민족주의적 감정으로, 한족과 대립되는 위대한 조상을 만들고자 치우 신화를 끌어들이고, 묘족의 전설이나 옛 이야기들 중 '치우'와 이름이 조금이라도 유사한 인물이 등장한다 싶으면 전부 치우와 연결지어 역사를 꾸며내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김 박사의 저서를 따르면, 묘족의 '치우 신화'라는 것도 곧이 믿을 수가 없다. 물론 일반인 계층에선 이미 신앙이 사멸했을 뿐[8] 조상신으로 섬겨진 역사가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치우천왕 나무위키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