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진정한 배움은 아이들로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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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이 넘어오는 소리


 올해를 시작하면서 (이렇게 긴 한 해가 될지 정말 몰랐지만) 한용운 선생님께서 집필하신 서울 북촌에 위치한 계동길 위 집에 머물며 선생님의 흔적과 자취를 느끼고, 지난해를 반추하는 글 한편과 새로운 해의 다짐, 소망 등을 채우는 글 한편을 썼었다. 글에 적힌 다짐 중 대표적인 몇 가지는 다름 아닌 '잘 읽기', '잘 쓰기' 그리고 '잘 가르치기'였다.

 몇 년 동안,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의 글쓰기, 파리에 파견된 연구원들 또는 석사생의 논문을 봐주며 다양한 한/영 글쓰기를 수업해왔다. 코로나로 인한 비대면 시대가 열리면서 아쉽게도 대면이 필수인 보컬 레슨을 듣는 학생들은 점점 줄어들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줌 zoom을 통해 글쓰기 수업은 계속할 수 있었고, 끈을 놓지 않으면서 학생들과 온/오프라인으로 고마운 인연을 이어왔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한 가지다. 글을 쓰면서 내 감정을, 그리고 감정이 담겼던 상황을 찬찬히 정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글을 쓰기 시작하면 그제야 비로소 상황을 한 발자국 떨어져서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나의 감정선이 직접적으로는 드러나지 않았던 그 시간을 돌아보는 데 시간과 품을 들이는 작업인 것이다. 이로 인한 장점은 애매하게 걸쳐져 있는 것들을 확실히 인지하게 되면서 나와 타자를 더욱 이해할 수 있게 되는 점이다. 이는 종종 배움과 성찰로 연결되니 성장을 도모하는 일로 귀결된다고 볼 수 있다.


'뭘 쓸까' 의 고민


 수업에서 에세이를 써오는 숙제를 낼 때마다 학생들이 늘 어려워하는 부분이 있다. 어떻게 하면 '잘' 쓸까, '언제까지' 써야 하나 하는 고민이 아닌, 바로 '뭘' 쓸까 이다. 소재의 부재는 학생들에게 가장 큰 고민거리이다. 예를 들어 내가 좋아하는 음식에 관해 쓴다면 그도 최소한 수십 가지가 될 것이요, 계절에 따라, 식감에 따라, 누구와 먹느냐에 따라 음식에 대한 감정은 수만 가지로 달라진다. 내가 의미를 부여하는 바에 따라 주제는 얼마든지 풍성해질 수 있고 반대로 축소될 수도 있다. 그러나 아직 생각의 틀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학생들은 의미보다는 주제 자체에만 치중한 나머지 이번 주 에세이는 대체 뭘 써야 하나, 하는 생각에 열심히 머리를 굴린다. 옆에서 지켜보고 있자면 그 작고 귀여운 머릿속에 뭔가 또르르 굴러다니는 소리가 들릴 정도다.

 글쓰기 시작한 학생들은 자신들이 조금씩 쓴 글의 조각들이 모이자, 이 같은 경험이 자신들을 더욱 단단한 사람으로 빚는데 큰 몫을 함을 깨닫는 듯했다. 어딘가에 발표, 출판되지 않거나, 당선되거나 등단하지 않으면 어떤가. 다른 누구도 아닌 내 손 끝에서 탄생된 글. 그 사실만으로도 나와 내 학생들은 서로의 소박한 글을 좋아했고, 생각의 근육을 키우고 성장하는 도구로서 글쓰기를 사랑했다. 내가 읽은 만큼 쓰고 쓴 만큼 성장한다는 진리, 이는 의미 없이 살아가는 내게 너무나 좋은 장치이니까. 이러한 점을 수업에서 나누는 것은 내게 가장 값지고 귀한 경험이었다.

 물론 나는 글을 잘 쓰는 사람이 아니다. 이성과 감성을 의식적으로 검열하지 않아도 연마할 수 있는 상태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수많은 사람 중 한 명일 뿐이다. 페북을 통해 좋아하는 작가님들이 공유하는 글들을 읽고 또 읽으면서, 매일같이 가슴이 뜨겁게 되곤 한다. 더욱 예리하고 섬세한 상태로 용감한, 독자에게 위로가 되면서도 영감이 되는 그런 멋진 글, 머리는 차갑게 가슴은 뜨겁게 글을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공교롭게도, 글쓰기는 딱 내 경험만큼만 할 수 있는 일이다. 안타깝게도 내가 경험하지 못하고 느끼지 못한 것에 대해 쓸 수는 없다. 하지만 내 글은 늘 부끄럽고, 부족하고, 터무니없고, 달군 돌처럼 그 순간에만 뜨거웠으며 늘 식어버린 잿더미처럼 초라했다. 뜨거운 가슴을 잃지는 않되 차가운 머리와 깊은 지성으로 활자를 붙들어야 하건만, 자문하면 늘 마음만이 앞선 탓에 대답할 수 없었다. 얕은 배움이 발목을 붙잡고 글의 완성도를 끌어내린다. 더 많이 알고 싶은 욕심, 주어진 것을 뛰어넘는 목마름에 활활 타버릴 것만 같았지만, 이런 마음을 학생들과 솔직하게 나누었다. 학생들이 내게 배워가는 것보다, 학생들에게 많은 것을 배우는 그런 염치없는 선생이다.


글쓰기의 중심은?


 글쓰기를 가르침은 물론, 올바르고 비판적인 사고를 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자세를 갖도록 하는 것이 수업의 중심이라고 볼 수 있다. 글쓰기 수업을 하면서, 단계별로 아이들의 적응력을 살피고 맞춤 지도 학습을 펼쳐야 하기에 커리큘럼과 수업의 디테일은 늘 조금씩 변화해왔다. 지난 몇 년 간 초등학생- 중학생- 고등학생을 상대로 글쓰기 수업을 이어왔고, 점점 더 구체화되고 세분화되는 학교 과제와 사회에서 민감하게 다뤄지는 이슈의 흐름 등에 편승해 학생들과 함께 발전을 이뤄왔다.

 나 또한 글쓰기에 적지 않은 시간을 할애하는지라, 에세이를 완성하고 나면 늘 학생들과 공유한다. 서로가 쓴 글을 돌려보고 같이 소리 내 읽는 작업은 상대방과 내가 동등한 위치에 있다는 점을 상기시켜준다. 독자로서 감상평을 장려하게 되면서 읽는 법, 쓰는 법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셈이다. 물론 글을 읽고 나서 감상평이 필요치 않을 때도 있다. 이미 소리 내 읽는 것으로부터 자신의 글이 어떻게 써졌는지 귀로 들리는 경험을 하면서 글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기르며 동시에 느끼고 생각하게 되기 때문이다.

 에세이 쓰는 기본적인 틀이 글에 적용되려면 정교하고 세세한 디테일 작업들이 동반되어야 한다. 여기서 선생이 할 수 있는 일은 적절한 어휘 표현을 통해 나의 생각과 주장을 구분하여 끼워 넣는 과정, 문장을 흐름에 맞게 적절히 배치하는 방법 등을 놓치지 않고 지도해주는 것. 하지만 글쓰기에 있어 아이들이 공통적으로 어려움을 느끼는 것은 다름 아닌 바로, 글 쓸 주제를 정하는 일이다. 한국의 주입식 교육의 틀 안에서 보낸 아이들의 대다수는 선택지 앞에서 내가 '뭘 원하는지'부터 알지 못하고, 글 쓰기 주제 선택부터 어려움을 겪는다 (에세이를 쓰는 시간이 만약 60분이라면, 첫 10-20분을 뭘 쓸지 '정하는' 과정에 할애할 정도다). 이러한 학생들의 모습을 보면서 정해져 있는 답만을 요구하고 성적을 매기는 경쟁구도 방식의 교육은 답답한 상자와도 같이 느껴졌다. 이는 분명 학생을 틀 안에 가두어 스스로 생각하는 법을 차단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굳어버린 틀 안에서 생각하는 방법을 잃어버린 학생들을 다시 말랑말랑하게 만들어주며, 교육자로서 어떻게 하면 '권위'를 내려놓고 적절한 '통제'를 이룰지에 대한 고민을 계속 이어오고 있다. 최근엔, 학생들과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놀라운 경험을 했다. 바로 그동안 가장 오래 가르친 (대략 2년 정도) 학생들이 마침 한국행을 앞두고 있는 나에게, 나와의 수업에 대한 에세이를 적고 싶다고 자청한 것이다. 그리고 지난주, 학생들이 완성했다며 보내준 에세이를 같이 읽었다. 아이들의 글엔 그동안 노력했던 나의 진심이 닿아 있음이 드러나 있었다. 가르치는 것보다 배우는 게 더 많았던 선생님인데... 사랑을 아끼지 않고 나눠주는 고마운 아이들. 나의 진정한 배움은 아이들로부터였음을, 그들은 알까. (아이들의 동의하에 에세이 일부를 브런치에 공유)

브런치 링크 나의 진정한 배움은 아이들로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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