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첩잡는 '버러지들'

in #kr2 months ago

범죄로 읽는 한국현대사- 간첩잡는 '버러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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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주간 분단 후 우리 현대사를 가로질렀던 여러 ‘간첩’들의 이야기를 해봤다.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지. 그들은 자신의 신념과 자신이 선택한 나라를 위해 대한민국의 발밑을 파고들었고, 대한민국 국가기관은 당연히 그들을 파헤치고 드러내려 애썼다. 그러나 간첩을 잡기란 쉽지 않은 일이야.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 정보기관들이 정보를 캐내기 위해, 또 정보를 빼내는 간첩을 잡아내기 위해 머리를 싸매고 하얗게 밤을 밝히고 있지.

그런데 한국 정보기관과 대공 수사기관들은 매우 특출한(?) ‘간첩잡이’ 실력을 발휘해왔다. 북한이 의욕적으로 간첩들을 내려보냈던 1960년대는 말할 것도 없고, 대남 전략을 수정했던 1970~1980년대에도 툭하면 ‘간첩단’ 뉴스가 지상을 장식하며 ‘간첩’을 무더기로 잡아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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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유머 한 자락을 소개할게. 세계 각국 정보기관에 깊은 산에서 쥐 한 마리를 잡아오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위성을 총동원해서 쥐를 찾아냈고, 러시아 정보기관은 CIA의 통신을 감청해 별 수고 없이 쥐를 확보했다. 그런데 한국 정보기관은 웬 곰 한 마리를 끌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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뭇 사람들이 이게 뭐냐고 물으니 한국 정보기관원이 대답도 하기 전에 온몸에 피멍이 들고 다리 두 개가 부러진 곰이 울부짖었다. “저는 쥐입니다. 찍찍. 아이고, 고양이 무서워. 저는 쥐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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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얘기는 한국 공안당국이 발휘했던 ‘유능함’의 실체가 무엇인지 대변한다. 간첩을 ‘만드는’ 분야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했던 한국 공안당국의 흑역사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지. 우리 현대사에 수도 없이 등장하는 수많은 간첩들의 정점에는 자백과 함께 소위 ‘그림’이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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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간첩입니다’라는 자백을 하면 끝나는 게 아니라 누구에게 포섭돼, 누구를 만났으며, 그 증거는 무엇인가 줄줄 외우고, 자신도 모르는 ‘증거’가 있는 장소까지 제보해야 했지. 찍찍 울어대면서 고양이를 겁내며 자신을 쥐라고 주장하는 곰처럼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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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14연대의 반란으로 촉발된 여순사건 이후 숙군(肅軍) 작업이 벌어지면서 많은 장병들이 좌익으로 몰려 죽었다. 일본군 헌병 출신인 김창룡은 그 유혈극의 선봉이었다. 붉은 치마만 봐도 미친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로 극단적인 ‘빨갱이’ 혐오자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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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룡은 후일 대통령이 되는 박정희를 비롯해 엄청난 사람들을 잡아들였고 동시에 그들을 좌익으로 ‘제조해’냈다. 육군 참모총장을 지낸 이종찬 장군은 김창룡을 불러 이렇게 꾸짖었다고 한다. “전기고문을 해대면 아무거나 불지 않을 이가 어디 있느냐. 이 버러지 같은 놈아(〈한겨레신문〉 1990년 3월30일).” 이후 한국 현대사에서 우리는 이런 부류의 ‘버러지’들을 자주 목도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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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1987〉에서 배우 김윤식이 살을 찌워가면서 열연했던 배역 ‘박 처장’을 기억할 거야. 억센 평안도 사투리를 구사하며 부모가 공산당 손에 죽었던 기억을 절절히 토로하지만, ‘빨갱이’ 잡는 데에는 공산당 못지않게 잔인하고 가혹했던 그는 실제 인물을 모델로 한다. 그 이름은 박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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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남도 용강의 지주 집안에서 나고 자란 그는 공산당 손에 가족을 잃은 뒤 열일곱 나이로 혈혈단신 남하해 경찰에 투신, 순경부터 시작해 경찰 조직의 별이라는 경무관까지 입신한 사람이야. 그를 암살하겠다며 북한이 간첩을 내려보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활약이 대단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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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활약’ 와중에 그는 앞서 언급한 특무대장 김창룡을 닮아가고 있었다. 〈1987〉 영화에서 보듯 그는 남영동 대공분실의 실세였다. ‘간첩’을 만들어내는 데에도 탁월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야. 1977년 중앙정보부조차 난색을 표하는 상황에서 박처원은 유신체제에 항거했던 지식인 리영희 교수를 잡아들이겠다고 고집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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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는 이번 기회에 유죄판결하고 뽄때를 보여주지 않으면 앞으로 사상통제를 할 수 없다(리영희 지음 〈대화〉).” 그리고 잡혀온 리영희에게 그만의 방식으로 협박을 하지. “자기 둘째손가락을 보라고 하더군. 보니까 굳은살이 잔뜩 나와 있더라고요. ‘30년 동안 펜대를 잡고 빨갱이 잡는 조서를 밤낮으로 쓴 그 유물이 바로 내 둘째손가락의 뚝살이오’ 하는데 정말 소름이 끼치더군(〈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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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많이 써 제꼈던 조서 가운데 그가 정말 잡아야 했던 ‘간첩’의 비율은 얼마나 됐을까. 그리고 합리적 증거를 통해 법을 어긴 범죄자로 밝혀진 사람은 또 몇 명이나 될까. 우리는 박처원이 가장 총애했다는 부하를 통해 그 속사정을 짐작해볼 수 있다. 고문기술자 이근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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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안은 1970년 경찰에 입문하자마자 박처원의 경호원으로 인연을 맺었다. 특출한 힘과 고문 실력으로 박처원의 아낌을 한 몸에 받았다고 한다. 박처원은 결재 과정도 무시하고 이근안에게 직접 보고를 받아 중간관리자들로부터 원성을 샀을 정도였지. 일제강점기에 해외 출장까지 다니며 독립운동가들을 고문했던 악질 경찰 김태석처럼, 이근안은 박처원의 호출이 있으면 어디든지 가서 그 실력(?)을 발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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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안에 따르면 남영동에 끌려온 이들에게 지옥을 경험하게 했던 ‘칠성판’, 즉 나무판자를 간이침대처럼 만든 뒤 사람을 눕히고 가죽끈으로 고정해 물을 퍼부었던 물고문 전용대의 발명자는 박처원이었어. 그들은 그 짓거리를 하면서 애국한다고 생각했겠지만 이종찬 장군이 김창룡에게 일갈했던 표현대로 실상은 ‘버러지’가 돼가고 있었지. 애국적 버러지라고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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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처원의 부하 가운데 김수현 경감이라는 이가 있었어. 1985년 남영동에 끌려온 김근태의 몸을 거의 부숴버렸던 고문 가해자야. 구체적인 범죄 내용을 여기서 읊고 싶지는 않구나. 그들은 사람이 아니었어. 그러나 고문 혐의로 김수현이 재판정에 섰을 때 김수현의 변호사는 이렇게 열변을 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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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건은 빨갱이를 잡는 데 일생을 바쳐온 대공 경찰과 좌익운동가들의 싸움이므로 이 싸움에서 자유민주주의가 반드시 승리해야 한다(〈동아일보〉 1990년 12월27일).” 변론이 끝나자 “방청석을 차지하고 있던 사복 차림의 대공 경찰관들은 힘찬 박수를 보냈”으며 고문 경관들은 끝까지 고문을 한 적이 없다고 발뺌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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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지켰다고 생각하는 나라는 민주주의국가다. 민주주의에서 최고 가치는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는 것이지. 그 인간을 부수고 짓밟으며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극한의 고통을 선사하던 이들이 ‘애국’을 논하는 일만큼의 언어도단은 없었다. 그들의 간첩 ‘제조’는 민주주의 국가가 응당 실현해야 할 방첩(防諜)의 의미와 기능에 대한 처절한 모욕이었지. 간첩 몇 명을 잡았든 그들의 공이 단 한 명의 간첩이라도 억지로 만든 과오를 덮을 수 없는 이유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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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11월 김근태 고문 사건 재판이 진행되고 증인신문이 열렸을 때 김근태는 남영동의 지옥에서 본 악마 김수현과 마주한다. 김근태는 끔찍한 악몽을 헤집으며 당시 김수현의 행각을 되짚었지만 김수현은 기계처럼 부인만 할 뿐이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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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이 끝났을 때 참으로 어이없게도 김수현은 김근태에게 손을 내민다. 황망한 악수 제의 앞에서 김근태보다도 그의 아내 인재근이 참지 못했다. 그는 김수현의 얼굴에 침을 뱉었지. 김수현은 허둥지둥 신문실을 나가버렸다. 우리 역사에 수많은 명장면이 있지만, 박처원 이하 고문 경관들은 후일 범법자로 처벌받았지만, 그날의 침 세례만큼 통쾌하면서도 고통스러운 장면을 다시 보기는 어려울 것 같구나.

이근안.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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