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왼손 검지를 꼭 기억하세요

in #stimcity9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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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의 <배낭영성>, 인쇄소에서 갓 나온 따끈따끈한 책이 내일이면 저희 집에 도착합니다.
이제 비를 뚫고 갈게요. :-)


올해는 시작부터 온통 서류로 무언가를 증명할 일투성이였다. 스스로도 의외라고 생각하는 부분인데 나는 그런 종류의 서류 업무에 쾌감 비슷한 것을 느낀다. 물론 짜증스럽고 귀찮은 일이지만 퀘스트를 완료하거나 칭찬 스티커를 모으는 기분이 든다. 대부분이 여백인 흰 종이 한 장이 많은 것을 설명해 낸다는 것이 좀 짜릿하다고 해야 하나. 클리어 파일 안에 새로운 종류의 서류가 추가될 때마다 세상 편하게 사는 방법을 하나씩 획득하는 것 같기도 하다. 최근에는 인감증명서라는 것이 필요했다. 부모님이 만들어 준 매끈하게 잘 빠진 도장이 있었는데 쓸 일이 없으니 잃어버린 지 오래고, 직장 생활할 때 사용했던 잉크 도장 또한 어느새 사라졌다. 그런 류의 물건들이 사라져 따로 모이는 세계가 어딘가에 존재하는 것이 틀림없다. 귀걸이 한 짝의 세계, 실핀의 세계, 머리끈의 세계 같은 곳 말이다. 인감증명서를 위해 도장 가게에서 오천 원을 주고 도장을 만들었다. 급하게 필요했던 거라 별 생각 없이 3분 만에 나오는 막도장을 만들고는 이거 너무 막 만들었나 잠깐 후회, 어차피 인감도장이란 자주 쓰지도 않을 기능뿐인 새끼손가락만 한 스틱에 불과한데 멋질 필요 있나 하고 빠르게 합리화.

어떤 프로세스가 순탄하게 흐르지 않을 때 짧고 굵은 스트레스를 받는다. 그 수준이 좀 병적이다. 이 또한 스스로도 의외라고 생각하는 부분이다. 이런 나를 가까운 곳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이 혀를 차며 염려할 정도이니 고칠 수 있다면 고치고 싶다. 문제는 이게 커다란 시련이나 난관 따위가 아니라 얼마간의 수정, 얼마간의 기다림이 필요한 아주 별것 아닌 일이라는 것이다. 주로 무언가를 신청하거나 주문할 때 일어나며, 관공서나 금융기관에서 처리하는 일들이 대표적인 예이다. 무언가를 요청했는데 특정의 이유로 담당자가 이를 바로 진행할 수 없는 상황을 견디기 힘들다. 해결하기 위해 시간과 노력을 다시 투입해야 하는 것도 아무렇지 않다. 그냥 일이 매끄럽게 흐르지 않는다는 사실 자체가 싫은 것이다. 세상 일이 다 그러할 텐데 어째서 고작 이런 일에 매번 스트레스를 받는지 모르겠다. 금방 나온 따끈한 도장을 들고 주민센터를 찾는 길에도 여지없이 심장이 벌렁벌렁했다. 이게 그럴 일인가 싶겠지만, 그래서 병적이라는 것이다. 속으로 계속 중얼거렸다. 한 방에 가자, 한 방에.

상냥한 주민센터의 직원이 나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지문 확인을 요구했다. 그리고 문제는 내 손가락 끝에서 일어났다. 열 손가락을 다 스캔해도 인식이 되지 않았다. 왼손 검지 한 번 대보시겠어요? 조금만 위로 올려보시겠어요? 왼손 중지 대보시겠어요? 왼손 약지, 오른손 엄지, 오른손 검지, 오른손 중지, 물티슈로 손가락을 닦고 해볼까요? 다시 왼손 엄지, 검지... 그녀는 진땀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안절부절못했지만, 사실 난 이 상황을 예상하고 있었다. 기계들이 내 지문을 읽지 못한다. 거의 모든 곳에서! 주민등록증을 만들 때도 그랬고, 공항 자동 입국심사대에서도 매번 있는 일이다. 대여섯 차례 시도하면 그제야 읽어 내거나 끝내는 포기하게 만든다. 성공한 시도가 실패한 시도들과 어떻게 다른지 여전히 알지 못한다. 그러니 해결 방법도 없다. 될 때까지 손가락을 바꾸어 가며 계속 문질러 대는 수밖에. 몇 년 전에는 친구들과 강원랜드에 갔는데 가져간 여권을 신분증으로 인정해주지 않아 옆에 있던 등본 발급 기계를 이용해야만 했다. 어떻게 됐냐고? 수십 차례 시도했는데도 내 지문을 인식하지 못해 결국 정선까지 갔다가 강원랜드 입구만 구경하고 돌아와야 했다. 지문 없는 친구를 둔 나의 친구들은 무슨 죄인가. 억장이 무너져서 결국 울고 말았...

아무튼 이번에도 끝을 알 수 없는 시도가 계속되고 있었다. 이건 포기할 수 없는 사안이었다. 인감증명서가 필요했다. 나도 진땀이 나기 시작했다. "죄송해요. 이게 매번 왜 그럴까요..." 하필 그날 주민센터에는 민원을 신청하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이 많았다. 뒤통수가 따가웠다. 키보드를 하도 두드려서 그나마 남은 지문조차도 사라지고 있는 것일까. 아냐, 내 아이폰은 언제나 잘만 알아차리는데... 조바심과 걱정이 아이폰에 대한 고마움으로 이어질 때 즈음,

"오! 됐어요!"

결국 성공했다. 주민센터의 상냥한 그녀가 엉덩이를 들썩이며 나보다 더 기뻐했다. 그리고 인감증명서를 건네주며 말했다.

"선생님, 왼손 검지를 꼭 기억하세요!"

조금은 개구쟁이 같은 눈을 하고 건넨 그 말이 무척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세상에, 스트레스가 단번에 사라졌다. 그 한마디가 어떻게 내 마음을 녹였는지, 어떻게 내 하루를 바꾸었는지 그녀는 상상도 하지 못할 것이다. 상냥한 표정으로 상냥한 말을 건넬 줄 아는 사람이 세상에 필요한 이유다. 인감증명서가 필요한 일이 생길 때마다, 일이 순탄치 않게 흐를 때마다 그녀의 개구쟁이 같은 눈과 내 왼손 검지를 떠올리려고 한다. 노심초사하지 말고 대담하게, 대담하게.

2020년과 2021년이 내게는 퍽 힘든 시간이 될 거라는 이야기를 듣고 올 한 해를 시작했다. 7개월이 지났으니 1쿼터가 끝난 셈이다. 이렇게 일상을 반복하며 살아 본 것이 참으로 오래간만이다. 그 사이 몇 차례 극심한 갑갑증에 시달리기도 했지만, 해야 할 일에만 오롯이 집중하며 명랑하게 지내온 것 같다. 다람살라에서 맞았던 몬순 이후 3년 만에 이렇게 하염없이 내리는 비를 본다. 다람살라, 라니. 경쾌하게 혀를 굴려 그 이름을 입 밖으로 천천히 뱉어 보니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상상 속의 마을처럼 느껴진다. 라다크 친구들에게는 올여름 라다크에는 꼭 갈 거라고 호언장담을 해 두었는데 어떻게 되려나 모르겠다. 이렇게 여름의 한가운데 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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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도착했어요! 고생하셨어요 동글님^^

무사히 도착했군요! 고마워요 보얀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