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련한 파괴왕의 즐거운 고민

in #stimcity3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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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분명 많이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지난주에는 방 청소를 심하게 했다. 처음에는 가볍게 책장을 정리할 셈이었다. 쌓아놓은 책들이 결국 무너지고 말았기 때문이다. 위태위태하더라니... 책을 꽂을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책장을 정리하다 보니까 책장에 책이 아닌 물건이 가득했다. 그리고 옷장에, 행거에, 서랍장에, 테이블 위에, 제자리를 잃고 헤매고 있는 물건들이 일제히 눈에 들어왔다. 물건, 물건, 물건. 물건의 습격이다! 게다가 온통 사용하지도 않는 물건들이다. 잘 사지 않는데도 그렇다. 잘 버리지도 않으니 당연한 일이다. 질식 직전의 상태가 된 내 방을 구해야 했다.

우선 뻔뻔하게 엉뚱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물건을 모두 방바닥으로 추방했다. 그러다 보니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물건도 그 난장판에 합류시키고 싶어졌다. 멀쩡히 자리를 지킨 물건들은 억울했겠지만 나는 이미 파괴에의 충동(?)에 사로잡혔기 때문에 그들에게 피할 구석은 없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테이블 위에 있는 물건들을 모두 쓸어 엎어 버리는 드라마 주인공처럼 한 번쯤은 미쳐 날뛰어 보고 싶었으나 화가 나지는 않았으니 평온한 마음으로 망설임 없이 파괴를 진행했다. 그건 좀 짜릿했다. 자, 이제 본격적인 엉망진창이다! 방바닥이 금세 발 디딜 틈 없이 들어찼다.

커다란 상자와 봉투를 준비하고 먼저 더는 함께 지낼 수 없을 물건을 골라냈다. 집어 드는 물건마다 엉겨 붙은 시간이 줄줄이 딸려 나왔다. 지워진 이름과 흐릿한 장면들. 때로는 생생한 목소리와 돌진하는 냄새. 제비뽑기처럼 무작위로 집어 들었기 때문에 무엇이 딸려 나올지 예측할 수 없었다. 당황하다가 그리워하다가 웃다가 울다가 시간이 지나자 멀미가 날 지경이었다. 정리하다가 자꾸만 손을 멈추고 추억의 주인공들에게 말을 걸었다. 이쯤 되니 청소가 아니라 놀이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 기이하고도 고생스러운 놀이다. 엄마 아빠는 청소를 하려면 낮에 할 일이지 왜 오밤중까지 난리부르스냐며 핀잔을 주었다. 내가 하도 끙끙거리니까 일단 두고 내일 마저 하라고 몇 번이나 날 말렸지만, 침대 역시 물건들로 점령된 상태였기 때문에 잠을 자려면 끝장을 봐야 했다. 커다란 박스와 봉투를 버릴 물건들로 채우고, 남아 있는 모든 물건을 제자리로 돌려놨다. 그 과정에서 단 한 번도 버릴까 말까 고민하지 않았다. 분리수거함에 던져버리듯 집히는 대로 여러 봉투에 나누어 담았다. 고민할 것 없이 쓰레기로 여기고 있는 물건을 왜 진작 버리지 않고 곁에 두고 있었을까. 몇 번이나 청소기를 돌리고 구석구석을 닦고 털고, 마침내 침대에 몸을 뉠 수 있게 되기까지 꼬박 다섯시간이 걸렸다.

다음날엔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지르는 바람에 몸져눕고 말았다. 기이한 놀이를 다섯시간이나 한 대가로 침대에 누워 하루를 보낸 것이다. 평소에 얼마나 운동을 안 하면 청소 좀 했다고 몸져눕냐 싶겠지만 쉬지 않고 앉았다 일어났다 허리를 구부렸다 폈다를 반복했으니 그럴 만도 하다. 고통도 고통인데 온몸이 삐걱거리니까 자괴감이 좀 밀려왔다. 아무래도 방 청소를 다섯시간이나 하는 건 좀 미련한 짓이다.

나는 일을 좀 미련하게 하는 경향이 있다. 최근에는 간단한 보고서를 썼는데, 이 일을 하는 과정도 방 청소와 비슷했다는 사실을, 욱신거리는 어깨를 주무르다가 깨달았다. 두 가지 모두 내가 잘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여기서 '잘 한다'는 것이 어디까지나 결과에 대한 판단이라면 말이다. 하지만 다른 조건들을 함께 따지면 그 반대다.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시간은 무엇보다 소중한 자원인데 양껏 가져다 쓴다. 효율을 따지자면 비효율도 이런 비효율이 없다. 이렇게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이유는 일을 '0'에서 시작하려 드는 습성 때문이다. 보고서의 경우 이미 개요도 나오고 자료 조사도 반 이상은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야말로 데이터를 찾아서 적절한 곳에 넣을 일만 남은 상태였다. 말하자면 5에서 9를 만들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0에서 시작하지 않으면 진행이 잘 안 되는 아주 미련한 습성이 내게 있다. 0에서 10을 만드는 일이 즐겁고 가치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청소 역시 여기저기 널려있는 물건을 책장이든 옷장이든 서랍 속이든 있어야 할 자리에 갖다 놓으면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책장에 꽂힌 책, 옷장 속의 옷, 테이블 위의 물건들, 서랍 속 물건들을 모두 꺼내 바닥에 늘어놓고 나서야 청소를 시작할 수 있는 파괴왕(?)의 마음가짐이 내 안에 있다. 그렇게 해야만 내가 만족할 수 있는 수준으로 보고서도 쓸 수 있고 청소도 할 수 있다.

지금의 상태를 0으로 돌리는 것은 그 자체로 일이다. 게다가 그것이 시작되면 0으로 가는 길에서 다시 방향을 바꿀 수 없다. 그러나 0에 도달하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나아갈 길이 천리만리 막막하지만 말이다. 청소와 보고서 이후 이 이상한 습성을 극복 또는 개선하는 것이 내가 해결해야 할 숙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인고의 시간을 이겨내고 마스터피스를 낳는 예술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예술가가 시간을 갈아 넣어 '0에서 10을 만드는 일'을 단 한 번이라도 해내야 한다면 나는 시간을 쪼개어 '5에서 9를 만드는 일'을 여러 번 해내야 한다. 그것이 익숙해지면 9를 넘어 10에 수렴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마음가짐에 달려 있기 때문에 아주 간단한 문제다. 동시에 가장 어려운 문제이기도 하다. 어쨌든 즐거운 고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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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가라 요정님이라고 불러드려야 할 것 같아요!

줄무늬를 걸치면 언제나 즐거워져요! :-)

저도 0에서 뭔가를 만드는 일을 좋아합니다. 가끔은 이게 "바퀴를 재발명하는 일"이 되기도 하지요. 바퀴를 다시 처음부터 만들 필요는 없는데 말이에요.

그런데 이 과정이 은근히 뿌듯한 경우가 있습니다. 하하.

그 점에서 q님과 제가 비슷하다고 막연하게 느끼고 있었어요. 그 뿌듯한 맛에 자꾸 바퀴를 처음부터 만드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도 그 과정에서 혼자 감탄하고 엄청 뿌듯해 합니다.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