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re's holiday?

in #stimcity4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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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일이다. 한국에 돌아왔더니 말 그대로 수중에 돈이 하나도 없길래 차비하려고 가진 책을 팔기 시작했는데, 그렇게 야금야금 팔다 보니 책장이 한 칸씩 비워져 갔다. 읽든 안 읽든 열심히 책을 사 모았고 또 귀하게 여겼기 때문에 처음에는 쓴 돈이 아깝기도 하고 죄스러운 마음까지 들었으나 나중에는 일말의 미련 없이 신나게 내다 팔았다. 이 정도 감가상각이면 꽤 괜찮은 중고 거래라는 생각까지 하면서.

알라딘에서 받아주지 않는 책은 동네 헌책방에 가져갔다. 그 헌책방의 이름은 흙서점인데 그 이름답게 안에 들어서면 퀴퀴한 냄새가 코를 덮쳤다. 곰팡이 냄새지만, 좀 서정적으로 흙냄새라고 표현하고 싶다. 그 냄새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아서 흙서점은 늘 붐볐다. 팔러 온 사람보다는 사러 온 사람이 많았고, 나도 원래는 그 퀴퀴한 냄새를 즐기며 책장을 뒤지기 위해 그곳을 찾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귀갓길에 들러 읽지도 않을 괴팍한 책들을 한 아름 사 들고 오는 것이 큰 즐거움이었다. 꼭두새벽에 출근하고 퇴근 후엔 여기저기 쫓아다니느라 독서는커녕 잘 시간도 부족했는데 우습게도 그 시절에 제일 책을 많이 샀다. 그리고 몇 년 후 남는 것이 시간뿐일 때는 얄궂게도 흙서점의 일등 공급자가 되고 만 것이다.

두 번은 읽지 않을 책들과 한 페이지도 읽지 않았지만 앞으로도 펼쳐 보지 않을 책들을 떠나보냈다. 벽돌같이 두꺼운 인문, 사회과학책을 가져가면 주인아저씨는 좋은 책이라며 종종 기뻐했다. 대부분 한 장도 읽지 않았기 때문에 새 책과 다를 바가 없었다. 육중한 책들이 먼저 떠나고 다음은 소설 차례였다. 모으고 있던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은 마지막까지 남았는데 뜻밖의 책테크를 하기도 했다. 롤리타 판권이 문학동네로 넘어간 이후 희귀본이 된 민음사 판을 중고나라에서 4만 원인가 주고 판 것은 쾌거(?)였다. 그 이후에는 내가 가진 책 중에 혹 희귀본이 있지는 않을까 하는 기대감까지 더해져 책을 파는 즐거움마저 느꼈다.

그렇게 몇 개월에 걸쳐 가진 책의 절반 이상을 팔았고, 책장을 몇 개 내다 버렸다. 흔적이 남아 팔지 못한 전공 서적과 각종 문고본 외에 지키려고 팔지 않은 소설책들이 남았다. 김승옥과 하루키가 창조한 세계, 홀든과 모모의 생각, 요조와 가즈코의 말, 그리고 마콘도와 모라비아의 이야기 같은 것들. 그 책들은 저마다 나의 어느 시절을 책임지고 있다. 누군가 그 '어느 시절'의 생각과 선택에 대한 배경이나 이유를 물어온다면 대답 대신 그중 하나를 뽑아 건넬 수 있다. 그러고 보면 책을 읽는 기쁨을 누렸던 순간들은 하나같이 동질감과 연결되어 있다. 질문에 대한 대답을 얻거나 이미 아는 것을 작가의 말로 다시 확인하거나 이야기에 묻은 감정이 내 안에서 그대로 되살아나던 순간들이다.

아무튼 그렇게 한동안 책과는 담을 쌓고 지내다가 몇 년 전부터는 다시 책이 쌓이기 시작했다. 도서관은 귀찮아서 좀처럼 가지 않고 전자책은 익숙하지 않으니 읽으려면 종이책을 사야 한다. 책장의 남는 자리마다 위아래로 테트리스 하듯 쑤셔 넣다 보니 더는 공간이 없어 테이블 위에 계속 쌓아 두고 있다. 책 무더기를 보면 막막해진다. 저거 언제 다 읽지? 책을 만들게 되면서부터는 쌓아둔 책에 대한 미안함과 책임감을 더 크게 느끼는 것 같다. 올겨울에는 마음 먹고 책 무더기 안에서 지내보려고 한다. 한 페이지도 읽히지 못한 채로 쫓겨 나간 책들에 사죄하기 위해서라도. 원래는 <어쩌다, 크루즈> 출간 후에 미친 듯이 놀아 재낄 계획이었는데 출간 파티는커녕 넉넉한 마음으로 저녁 한 끼조차 하기 어려운 상황이니 책 무더기에서의 시간을 홀리데이로 여기면 되겠다.

어떤 책을 읽기 시작하면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는 다른 책에 손을 대지 않는데, 요즘은 그때그때 아무거나 잡히는 대로 펼쳐 읽는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그 책이 기다렸다는 듯 내 질문에 답을 해온다. 타로카드 뽑는 것처럼. 이것 또한 즐거운 경험이다. 피터 작가의 <배낭영성>도, 젠젠 작가의 <어쩌다, 크루즈>도 누군가의 질문에 대답을 건네고, 누군가의 기억과 호기심에 플레이 버튼을 누르는 책이 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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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원래 산만하게 읽는 발췌독 타입이다보니 마지막 문단에서 이상하게 기시감이ㅋㅋ 그나저나 코로나가 빨리 지나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올 한해에 다른 나라를 다니지 못했더니 답답하군요.

좀 생뚱맞지만... 저는 답답한 마음을 극복하고자 매일 밤 이런 걸 듣는답니다.


우주여행을 하며 q님 댓글을 읽는데, q님의 우주와 같은 서재가 머릿속에 그려졌고요. 히히. 이 정도면 괜찮은 새벽이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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