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술] 운수 좋은 날의 이자카야

in #stimcity24 day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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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추적추적 오는 날이었다. 술꾼에게 비가 오는 건 절대 나쁜 징조가 아니다. 날이 더우면 갈증이 한번에 해소되는 차가운 맥주나 하이볼을 마시듯 비가 오면 막걸리에 전이 마시고 싶고, 비가 오는데다 춥기까지 하면 데운 사케나 위스키를 마셔 몸을 데우면 되니까. 어찌보면 술꾼에게 날씨란 그 날의 술을 결정하는 요인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 교토 2일 차, 비가 오고 몸이 으슬으슬하니 위스키 생각이 낮부터 간절했다. 일본에서 웬 위스키 타령이냐고? 아는 사람은 다 알겠지만 일본은 세계 5대 위스키 산지의 하나로 손꼽힌다. 일본의 위스키 역사의 시작은 1920년 전후로 볼 수 있다. 사케 양조장의 아들이자 직원이었던 타케츠루 마사타카는 1916년 위스키를 배우러 스코틀랜드로 갔고 4년 간의 유학 끝에 돌아오지만 그 당시 사회적인 분위기로 곧바로 위스키 제조를 할 수 없었다. 이때 산토리 주류의 창립자가 그를 스카웃해 야마자키 증류소를 세우고 위스키를 만들기 시작했다. 100년 가까운 역사를 지녔으나 일본 위스키가 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2000년대에 들어서이다. 월드 위스키 어워드에서 히비키 21년이나 야마자키, 타케츠루 17년 등이 조명되었고 그 이후로 일본 위스키의 가격은 부르는 게 값이라고 할 정도로 훌쩍 올랐다. 없어서 못파는 일본 위스키 자체도 훌륭하지만 주세가 낮은 일본의 바는 어마어마한 라인업의 올드 바틀을 저렴한 가격에 먹을 수 있는 위스키 마니아들의 방앗간이기도 하다. 처음 일본에서 위스키를 경험하고 한국에서 다양한 시음회를 쫓아다니며 레벨 0에서 1정도로 소폭 올라간 나는 이번 교토 여행이 나의 위스키 경험치를 높여줄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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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를 간 이유는 스팀시티 밋업 때문이었다. 교토에서 위즈덤 레이스를 진행 중이던 마법사님과 춘자 외에 다른 사람들은 1박 2일의 짧은 일정으로 교토를 왔으나 난 이런저런 술을 먹을 요량으로 남들보다 먼저 와 있었다. 낮부터 바쁘게 움직인 우리 셋은 저녁을 배불리 먹고는 교토의 밤을 즐기기로 했다. 함께한 둘 다 술을 찾아먹지도 즐겨먹지도 않기에 교토 술투어는 자연스레 내 담당이 되었다. 혼자면 좀 더 마음껏 위스키바를 활보하고 다닐테지만 술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을 데리고 내 욕심만 채울 수는 없었다. 그래서 흥분을 가라앉히고 우선 가장 가까운 곳의 스탠딩 위스키바를 갔다. 캐주얼한 인테리어에 스탠딩 바인 만큼 빨리 마시고 빨리 가는 분위기이다. 위스키는 늘 앉아서 오래도록 그 향과 색을 관찰하며 그 맛을 음미했던 터라 이 분위기가 익숙하지는 않다. 또한 술 진열대를 보고는 솔직히 실망했다. 일본 위스키 종류도 별로 없거니와 내 눈을 초롱초롱 빛나게 만들 위스키가 없었기 때문이다. 고민 끝에 먹어보지 않은 일본 증류소의 술을 하나 골랐다. 나는 당연히 니트로, 춘자는 온더락으로 마법사님은 하이볼로 마셨다. 가볍게 와서 가볍게 수다 떨며 부담없이 마시는 이 곳의 컨셉에 맞게 내가 고른 술은 저렴하고 무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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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템포 숨도 좀 골랐겠다 다음으로는 예전에 잡지에서 보고 메모해 두었던 바 the door를 가보기로 했다. 이곳이 재밌는 건 얼음 공예의 장인이 직접 예리한 칼로 수정처럼 맑은 얼음을 조각한다는 것이다. 사각사각 투명한 눈이 내리며 빚어지는 그 동그란 얼음에 위스키를 담아 먹는 맛이 어떤지 너무도 궁금했다. 또한 칵테일 대회에서 우승한 적이 있는 바텐더와 정원이 있는 마당에 시가도 필 수 있어 버라이어티하게 즐길 수 있어 보였다. 오래된 일본 가옥에 나무 간판, 그 앞에 주차된 빨간 자전거까지 일본스러운 풍경 안에 있는 더 도어의 굳게 닫힌 문을 힘주어 열었더니 천천히 스탭이 나온다

"죄송하지만 만석입니다."

"혹시 여기서 기다렸다 들어가도 될까요??"

"자리가 언제날지 몰라서.."

"그럼 조금 이따 다시 오겠습니다."

야심차게 어떤 가게를 갔는데 이렇게 튕겨져 나갈 때 어쩔 수 없이 허망함을 느끼게 된다. 심지어 오늘은 내가 가이드가 아닌가.

"그럼, 근처에 딴데를 갔다가 다시 오도록 하죠."

짧은 시간 머리를 굴리던 나는 지난 교토 여행 때 친구들 모두가 좋아했던 사와바 sour가 떠올랐다. 사와는 과즙이나 매실, 우롱차 등에 술을 섞어 만든 음료를 통칭하는 일본식 표현으로 일본 특유의 칵테일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우리나라에도 판매되는 호로요이가 대표적인 사와로 다양한 브랜드에서 시제품으로 만들어 판매하고 있으며 레몬 사와, 복숭아 사와, 포도 사와 등 그 맛도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술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달콤하게 맛있게 먹을 수 있는데 특히 sour의 사와는 생과일로 만들어 굉장히 신선하면서 공간 자체도 굉장히 힙하기 때문에 기분을 환기시킬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는 sour로 발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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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ur는 굳게 닫혀있던 방금의 바와는 달리 마치 문이 없는 것처럼 활짝 열려있다. 붉은 조명과 감각적인 간판이 돋보이는 스탠딩 바이다. 한껏 멋부린 일본 젊은이들이 삼삼오오 서서 예쁘장한 술을 마시며 수다를 떤다. 공간이 넓지 않아 1자로 길게 놓여진 테이블에 서 있는 사람들을 지나면 카운터가 바로 나타난다. 그 뒤로 오픈된 냉장실에 마치 모형처럼 생긴 신선한 생과일이 가득 진열되어 있다. 주문을 받으면 바로 생과일로 사와를 만들어준다. 근데 생과일이 보통 많이 들어가는 게 아니다. 가장 인기 있는 메뉴는 딸기가 수북히 쌓여 화려한 딸기 사와인데 술이라고는 전혀 보이지 않고 아무리 봐도 딸기에이드로 보일 뿐이다.

처음 왔을 때 먹어본 드래곤프루트 사와도 맛있었지만 이번에는 키위 사와를 먹어봤다. 술 자체도 너무 달지 않고 맛있는데 거기에 아낌없이 들어간 키위도 신선하고 조화롭다. '인생은 시지만, 사와는 맛있어요.'라는 동음이이어를 활용한 센스있는 슬로건이나 힙한 음악 감각적인 일러스트를 활용해 간판, 컵, 명함 등을 만들어 놓은 것도 좋았다.

"두 번 연속 스탠딩 바에 오니 다리가 너무 아프다."

둘 다 sour를 꽤 좋아하는 눈치였으나 오랜 시간 서서 술을 먹는데에 서서히 지쳐가고 있었다. 일본에 사는 친구가 한국에 스탠딩 맥주 바를 꼭 내고 싶다는 얘기를 거의 10년 전부터 해왔는데 나는 언제나 그 가게의 미래가 잿빛이라고 점쳤다. 일본이 기본적으로 간단히 한잔 두잔을 마시고 빨리 집에 가는 문화라고 하면은 한국은 진득하니 앉아서 안주도 잔뜩 시켜먹고 술도 병을 세어가면서 먹는 문화이기 때문이다. 어디에도 팔지 않는 끝내주는 맥주가 있거나 그 컨셉을 기가 막히게 잡지 않는 이상 나도 사람들도 그 스탠딩바를 가지 않을 것이 너무도 분명하다. 조선시대에 선술집이 가능했던 이유는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행상인들을 대상으로 했기 때문일터다. sour를 나와 다시 한 번 the door에 가보기로 했다. 그다지 술을 좋아하지 않는 관광객 2명을 이끌고 가이드 중인 술꾼은 '제발 자리가 있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또 기도하며 초조하게 움직였다.

"자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역시, 자리는 없었다. 부슬부슬 내리던 비는 점점 줄기가 굵어지고 있었다. 시간은 10시, 여행까지 가서 10시에 집에 가는 건 너무 야속하다. 그 주변을 아무리 훑어봐도 위스키 파는 바를 찾기 힘들었고 앉아서 먹을 곳도 보이지 않았으며 가게의 불들이 차례 차례 꺼지고 있었다. 맛있는 위스키를 먹을 표식으로만 느껴졌던 비는 연달아 퇴짜 맞고 갈 곳 없이 헤메는 우리의 처지를 비참하게 만드는 장치로 바뀌었다. 정 안되면 편의점에서 맥주라도 사서 숙소에서 먹자고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숙소로 향했다. 우리의 정수리와 어깨는 비로 축축히 젖어 가고 있었다. 괜히 the door를 가보겠다고 고집부리는 통에 일이 꼬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죄지은 마음으로 속죄하듯 비를 맞다 반짝이는 노란 불 두 개를 발견했다.

"저기, 저기 술집 두 개가 연달아 있어요!"

나는 환희에 찬 목소리로 외쳤고 우리 모두 지친 미소를 지으며 우리와 더 가까이에 있던 술집으로 들어갔다. 술집은 꽤 넓었는데 사람이 많지 않고휑했다.

"11시에 문 닫습니다."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교토 시내를 두 발 닳을 정도로 헤매다가 겨우 들어온 곳인데 이제 고작 30분 만을 남겨두었다니. 4시간만에 의자에 붙인 엉덩이가 무거워 일어나기가 힘들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옆집에 들어갔다. ㄴ자의 바가있는 작고 정겨운 이자카야 였다.

"어서 오세요."

드르륵 문을 열고 들어가자 명랑한 인사가 우리를 반긴다.

"여기 몇시 까지 하시나요?"

"2시까지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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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야 안도한 우리는 셋이 쪼로록 앉았다. 가장 먼저 눈에 띤건 천장에 대롱대롱 거꾸로 매달린 일본 술들이었다. 병에 수동 디스펜서가 부착되어 있어 누르면 바로 나오는 술들은 따르는 수고를 줄일 뿐 아니라 한 눈에 다양한 술을 볼 수 있어 눈도 즐거웠다. 영화 심야식당을 현실화한 것 같은 곳이었다. 호탕한 사장과 싹싹한 직원들, 젊은 커플과 노부부 손님들 사이에 친밀한 온도가 느껴졌다. 밝은 표정과 유쾌한 웃음소리에 슬며시 입꼬리가 따라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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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뉴를 펼치니 가격도 싸다. 사시미 500엔, 해산물 샐러드 500엔 믿을 수 없는 가격이라 당연히 극소량이 나올 거라 생각했는데 양도 상당하고 맛도 있다. 술 종류도 다양해서 고심하다 비를 맞고 오돌오돌 떤 내 몸을 녹이기 위해 고구마 소주를 선택한다. 일본 술 하면 대부분 사케를 많이 떠올리지만 증류주인 소주 역시 지역마다의 특색을 살려서 만들기로 유명하다. 쌀과 보리 고구마 등으로 주로 만드는데 그 중 가장 유명한고 인기가 많은 건 고구마 소주이다. 일본 고구마 생산량의 20%가 소주 원료로 쓰이고 특히 고구마 산지인 가고시마현과 미야자키 현에서 생산되는 고구마 절반 이상이 소주 원료로 쓰인다고 한다. 증류주를 좋아하지만 너무 맑고 특색없는 건 싫다. 그래서 소주도 오크통 숙성이나 원료가 쌀이 아닌 독특한 걸 좋아하기에 고구마 소주는 꼭 한 번 마시려고는 생각했는데 우연치 않게 기회가 온거다. 메뉴판에 고구마 소주가 5~6개 정도 있었고 글자가 예쁜 걸 골랐다. 고구마 소주는 고구마 특유의 텁텁하면서 달콤함, 묵직함이 살아있고 쿰쿰하면서 구수한 느낌도 나는 것이 매력있었다. 소주 한 입에 따뜻함과 구수함이 훅 빨려들러 몸 안에 서서히 퍼졌다.

"어느 나라 사람이에요?"

"한국 사람이에요."

"여긴 어떻게 왔어요?"

"갈 곳이 없어 헤매다 보니 이리로 오게 되었어요."

"어쩐지, 여기까지 외국인들이 잘 오지는 않는데."

비에 맞은 생쥐 꼴 외국인이 자신의 단골가게에 온 게 신기한지 노부부는 말을 걸었다. 별다른 특별한 대화도 아니었는데 훈기 어린 말투와 배려가 녹아들어 있어 기분이 좋았다. 2번의 문전박대와 비까지 쫄딱 맞으며 교토를 헤맸던 운수가 별로였던 하루는 우연한 이자카야와의 만남으로 운수가 좋은 날로 뒤바꼈다. 우리는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다양한 안주와 술을 맛보고 사람들과 웃음을 나누었다. 우연히 기어들어간 곳이라 이곳이 어디였는지 이름이 뭐였는지 전혀 정보도 알 수 없고 기억도 나지 않는다. 다시 찾으려고 해도 찾지 못할 것 같다. 꼭 한 번 더 가고싶긴 하지만 꼭 찾지 않아도 괜찮다. 그 날 밤의 마법 같은 순간을 만들어준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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