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 크루즈 투어] 취해도 좋은 크루즈의 어느 낮과 밤

in #stimcity4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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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되는 똑같은 하루의 무료함, 돈을 벌기 위해 반복되는 일의 수고로움, 빌딩으로 가득 찬 반복되는 풍경의 지긋지긋함. 그런 것을 잊기 위해서는 땅끝에는 서줘야 한다. 더 갈 곳 없는 땅끝의 탁 트인 바다와 코를 간질이는 짠 바람, 시원하게 몰아치는 파도 소리 앞에서는 핑퐁핑퐁 앞뒤로만 움직이는 일상은 그나마 꽤 지워지니깐. 술이라는 속성 자체가 무언가를 잊게 하거나 도망치게 해주는 만큼 일상에서 완벽하게 도망치기 위해서는 바다만큼 완벽한 배경도, 바다와 술만큼 완벽한 조화도 없다. 그런 면에서 땅끝도 아닌 바다, 그 위에 우두커니 서서 술을 마실 수 있는 크루즈는 그 어떤 장소보다 술을 먹기 적절한 장소이다. 크루즈에서 사람을 사귀는 공간은 보통 정찬 식당이거나 바였기에 누군가를 만나면 이름, 출신 국가, 다음으로 바로 이런 질문을 했다.

"너희 나라말로 치얼스가 뭐야?"

"샬롯”, “건배”, “스콜” ”슬렌체” “마젤토브”

테이블에 다양한 국적이 있을수록 외치는 건배 소리는 늘어났다. 멕시코에서 온 아줌마 카르멘과 덴마크에서 온 할머니 위니와, 스코틀랜드에서 온 할아버지 빌의 입에서 나오는 ‘건배’란 단어는 발음이 어색해서인지 그들과 어울리지 않아서인지 꼭 다른 말 같았다. 하지만 잔을 부딪히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함께 하는 날이 길어질수록 그들은 모국어처럼 ‘건배’를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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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크루즈의 바, 보통 한 크루즈 당 바가 6~7개는 된다.

보통 크루즈에서 술은 유료인데다 세금까지 붙어 맥주 한 잔에 7~8달러, 칵테일은 못 해도 10~15달러는 줘야 하기에 마음껏 취하도록 마신 적은 별로 없었다. 하지만 예외인 배가 있었으니 바로 세 번째, 네 번째에 탔던 스페인 크루즈인 풀만투르이다. 이 배는 술이 무제한이었다. 무제한 주류를 제공하는 만큼 전 세계 내노라하는 술꾼들이 다 모여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폭탄주의 나라, 24시간 술집이 존재하는 나라, 한국 대표인 내가 도저히 못 당하는 사람이 둘 있었으니 함께 정찬을 먹던 스코틀랜드 출신의 빌과 노만이다. 70도 가뿐히 넘긴 이 두 할아버지는 매일 저녁 하루도 쉬지 않고 경쟁하듯 술을 마셔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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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오른쪽이 빌, 중간 하와이안 셔츠가 노만이다.

"와인병에 있는 술을 전부 따라줘!"

"어어? 빌이 나보다 더 가득 받았잖아."

둘은 투닥거리며 늘 웨이터에게 자신에게만 더 많은 술을 따를 것을 요구하곤 했다. 난 이 장난감 내 거니 네 거니 유치하게 싸우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늘 그들의 다툼을 구경했다. 나이가 들면 아이가 된다는 건 세계 공통인가보다. 매일 그렇게 저녁에 1~2병의 와인을 각자 마시고는 저녁 공연을 보기 전에 맥주, 공연을 보고 나서 위스키나 브랜디까지 거하게 마시고도 빌과 노만은 취해 보인 적도 없었고 숙취가 있다는 말을 하지도 않았다. 이것이 진정 술꾼의 나라, 스코틀랜드인의 간인가? 경악하면서도 저녁에만 마시니까 가능한 일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하지만 그건 내 착각이었다.

낮에 일광욕 하기 위해 선베드를 찾아다니다 빌과 스티브가 같이 있는 걸 보고 나도 그 옆에 자리를 잡았다. 가만히 책을 읽으며 정적인 스티브와 달리 빌은 자꾸만 부산했다. 눈을 감고 해를 쬐던 나는 자꾸만 왔다 갔다 하는 빌이 대체 뭘 하나 싶어 눈을 떴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에 해 맑게 웃으며 양손에 맥주를 들고 뛰어오는 빌이 보였다.

"젠~ 너도 맥주 마실래?"

빌의 얼굴은 곧 폭파라도 할 것처럼 벌갰는데, 일광욕 때문이기도 하고 낮술 때문이기도 했다.

“스티브, 빌은 낮에도 이렇게 계속 술을 마셔?”

“어. 저자는 좀 미쳤어. 끊임없이 맥주를 마셔.”

“빌, 이게 너의 첫 크루즈라고 했지? 너는 이 크루즈에 탄 게 정말 다행이다.”

“왜?”

“보통 크루즈는 술값이 엄청나게 비싼 데 지금 먹는 만큼 먹었으면 크루즈값보다 술값이 더 나왔을 테니까.”

“그래~알고 이 배를 탄 거야.”

빌은 자신의 결정이 만족스럽다는 듯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자, 우리 한번 계산해보자. 보통 크루즈에서 맥주 한 캔 5달러, 와인과 브랜디 한잔 7달러라 치면 빌은 보통 하루에 맥주 10캔에 와인 10잔에 브랜드도 한 5잔 정도 마시니 최소 150달러네 거기에 14일이니까 2100달러!!.”

“진짜, 크루즈보다 비싸네.”

“그렇게 치면 빌은 여기에 와서 돈을 버는 셈이야!”

“오오, 휴가에 와서 돈을 벌다니 정말 좋겠다. 네가 부러워.”

빌을 놀리는 데 재미가 붙은 나와 스티브가 쉴 새 없이 말장난하는데 빌은 그런 자신이 자랑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맥주를 꿀꺽꿀꺽 마시고 있다. 정말이지 못 말리는 빌이다.

"하지만 나도 너 못지 않게 돈을 벌고있어. 건배하자."

나는 빌이 가져온 맥주를 딸칵 따고 우리는 캔을 높게 부딪혔다. 청량감있는 맥주를 벌컥벌컥 마시니 몸에 있는 열기가 한번에 가셔 나도 모르게 '크으'소리를 내었다. 이런 우리 둘을 보고 스티브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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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찬이 끝나면 테이블 혹은 바에 앉아 같이 술을 마셨다.

크루즈에서 함께 마시는 술은 즐거운 시간도 만들어 주고 또한 속 깊은 얘기도 꺼내게 만든다. 얼굴 곳곳에 흘러간 세월을 새긴 주름살과 하얗게 샌 머리, 거동이 불편해 늘 한 몸처럼 지팡이를 들고 다니는 덴마크인 위니는 80이 다 돼가지만 핫핑크 슈트를 소화하는 멋쟁이였다. 20대에 뉴욕에 잠깐 살았다던 그녀가 늘 크루즈에서 시키던 술은 세븐세븐이었다. 세븐세븐은 세븐 크라운 위스키와 세븐 업을 섞어 만드는 칵테일로 존 트라볼타가 주연한 뮤지컬 영화인 <토요일 밤의 열기>에 등장하고 70년대 미국의 펍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술이라고 한다. 20대에 뉴욕에 가서 바에서 처음 마신 세븐세븐을, 그때의 로맨스를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조잘조잘 이야기하며 마시는 위니는 영락없이 20대 소녀였다.

"나 60대 생일을 마추픽추에서 보냈었어. 정말 행복한 생일이었지."

남편과는 진작에 헤어지고 혼자 자식 셋을 키웠다던 위니는 60세가 되기 전에 딸을 먼저 보내고 그 충격에 혼자 세계여행을 했다고 했다. 흰머리를 휘날리며 씩씩하게 마추픽추 정상에 올라 신비로운 고대도시를 내려다보며 세븐세븐을 마시는 지금보다 젊은 위니가 내 머릿속에 그려졌다. 상상 속의 위니는 마추픽추에서 맞은 생일에 감격하면서도 조금은 아련한 표정이었다. 20대의 위니와는 연애 얘기를 잔뜩 하고 까르르 웃을 수 있었지만, 60대의 위니는 몸이 으스러질 정도로 꽈악 안아주고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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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과 나 그리고 위니

"내가 이제 할 수 있는 여행은 이제 크루즈뿐이야."

지팡이를 짚고 걷는 80대의 위니는 이제 크루즈 여행밖에 할 수 없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세븐세븐을 더블샷으로 4잔 넘게 먹을 수 있는 체력이 남아있었기에 우리는 늘 크루즈 바 자리에 앉아 술을 마시며 속내를 주고받을 수 있었다. 나는 위니 나이의 반절도 넘게 어리지만 독한 세븐세븐 더블을 먹을 수 없어 늘 세븐세븐 싱글을 마셨다. 바에 앉아 술잔을 기울이며 바텐더가 귀엽다는 귓속말을 하는 우리 둘은 그때만큼은 둘 다 나이를 초월한 동갑내기 친구가 되었다. 그리운 시간들이다.

땅끝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마시는 것도 아닌, 바다의 한가운데에 우뚝 서서 바다와 마주하며 마시는 술은 호사스럽다. 크루즈가 만들어내는 지상낙원의 풍경들, 어느 때나 부족함 먹을 수 있는 과일과 안주, 따사로이 부서지는 태양까지 더해지면 거기에 비루한 현실이 끼어들 틈은 없다. 술을 마시고 필터를 낀 채 바라보는 세상이 현실보다 더 그럴 듯해 평소에 술을 마신다면, 크루즈에서는 꼭 쥐고 놓고 싶지 않은 지금의 시간을 느리게 감기 위해서 술을 마신다. 느리게 느리게 음미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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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크루즈여행 너무 궁금하네요. 재밌게 잘봤습니다.
저도 가게된다면 술이 무제한인 배를 찾아봐야겠어요 ㅎㅎ

술쟁이라면 술이 무제한인 배나, 프로모션으로 주류 패키지를 제공하는 배를 꼭 타셔야만 합니다 :) 근데 너무 매일 술을 마시니 급격히 피곤해진다는 단점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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