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섭 가다

in #zzanlast month

1956년 9월 6일 천재의 최후

17년 전 생짜 조연출 시절에 중국 촬영을 가서 옛 고구려의 흔적을 구경한 적이 있다. 광개토왕비도 보았고 태왕릉 돌무더기에도 올라 봤고, 압록강 건너 북한의 만포를 굽어보며 감흥에 젖어도 봤는데 잊을 수 없는 기억은 고구려 고분 벽화를 생생하게 바라볼 기회를 가졌다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직접 들어가진 못했고 소수 정예만 잠입해서 찍어온 촬영본을 보는 정도였지만 그것만 해도 대단한 감흥이었다.

근 천 오륙백년전의 그림이 이렇게 선명하게 남아 있다니. 그 색감이며 붓 터치감까지 만져질 듯이 살갑고 생생했었다. 미술에 소질이라고는 내시 수염만큼도 없는 처지임에도 그랬으니 그 재질이 비범한 사람들의 감흥은 나에게 댈 것이 못될 것이다. 하물며 이중섭 같은 천재 화가임에랴. ...

이중섭이 태어난 평안남도 평원군은 평양 근처에 있었고 고구려 시대 고분도 산재해 있었다. 조선 시대 내내 차별을 당했으면서도 민족 의식은 유달리 뛰어났던 서북 지역 사람들답게 학교 소풍은 고구려 고분이나 사찰로 잡는 경우가 많았고 이중섭은 거기서 고구려 벽화와 마주할 기회가 있었다고 한다. 어떤 전문가에 따르면 이중섭이 즐겨 그린 소 가운데에서는 꼬리의 강렬한 선이 특히 두드러지는데 이는 고구려 벽화의 영향이라고도 한다.

IE002443306_STD.jpg

어쨌건 부잣집에서 자라서 이중섭은 미술 공부를 아쉽지 않게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스승도 잘 만났다. 오산학교 선생으로 왔던 임용련은 이중섭의 천재성을 발견하고 그를 격려해 주었다. 장래의 대화가라고 인정해 주는 선생 밑에서 이중섭은 자유롭게 미술을 배웠고 그의 독창적인 기법이나 화법은 이 즈음에 모티브를 둔 것들이 많다고 한다. 두꺼운 한지에 먹물을 들인 후 철필로 긁어 그 하얀 부분을 드러나게 하는 방식도 썼는데 바로 먼 훗날 껌종이 은박지에 그려냈던 그 기법과 유사하다는 것.

일본 유학 생활 중 그는 멋쟁이였다. 환영회에서 만장한 일본인 가운데 일어나 조선 노래를 신나게 불어젖힌 일은 유학생들 사이에서 환호를 받았고, 모든 운동에 만능이었다. 권투를 배워 조선인들에게 못되게 노는 일본인들을 때려 주기도 했고, 해수욕장에서는 육체미를 자랑하는 건장한 청년이었다. 이 멋있는 조선 총각은 일본의 한 양갓집 규수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그 역시 그녀의 포로가 된다. 일본 아내는 조선으로 건너왔고 이름조차 이남덕으로 역으로 창씨개명하여 이중섭의 슬픈 아내가 된다.

127702_56691_3802.jpg

이중섭은 확실한 그림쟁이였다. 어려서부터 할머니가 사과를 주면 그를 그린 다음에 먹었고 새를 보면 나뭇가지에서 새가 떠날 때까지 지켜봤다는 그가 평생 동안 즐겨 그린 소재 가운데 하나는 소였다. 어찌나 소를 주의깊게 지켜봤던지 한 번은 소도둑으로 몰려 곤욕을 치르기도 한 일화는 유명하다.

이 그림 밖에 모르는 이,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평생 어려움도 모르고 살았던 이 화가는 해방과 분단을 맞으면서 되레 암울해지기 시작한다. 새롭게 한반도 북단에 들어선 인민공화국 정부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복무'하지 못하는 예술들을 흰눈으로 봤고 또 그들에게는 소련이라는 상전이 버티고 있었다. 예술동맹에서 이중섭의 그림을 소련 평론가들에게 보여줬을 때 그들은 "인민의 적" 판정을 내린다. <투계>같은 그림이 인민들에게 공포감을 준다는 것이다.

투계1954.jpg

친구 한묵은 그의 월남의 이유를 표현의 자유를 찾은 탈출로 본다. "문화부의 허락을 받아야 전시할 수 있었는데 그림을 이데올로기적으로만 평가했기 때문에 왜 빨간꽃이 없냐는 식으로 시비를 걸었죠." 그것도 지긋지긋했지만 북한을 점령한 UN군이 퇴각한 뒤 감당해야 할 폭격은 현실적인 공포였다. 심지어 원폭까지 투하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일찍이 돌아간 아버지를 대신해 이중섭을 키웠던 어머니가 결단을 내린다. "중섭이 너 내려 가라."

함경도 일원 사람들은 육로로 탈출하기가 어려웠다. 중공군과 인민군이 빠르게 남하하여 원산 흥남 일원을 포위해 버렸기 때문이다. 이중섭 일가 또한 배를 타고 탈출했다. 그렇게 '자유대한'에 오긴 왔지만 북한 문화부 이상으로 지긋지긋하고 폭격만큼이나 무서운 존재가 그를 몸서리치게 환영했다. 그것은 가난이었다.

"막내아이의 기저귀 한 장 없었습니다. 모든 재산이라 할 그림도 이북의 어머니께 두고 왔지요. 곧 다시 돌아갈 수 있을 줄만 알고 있었죠."(부인 이남덕) 평생 당해 보지 않았던 가난과 굶주림의 공포는 그의 육체와 정신을 좀먹는다. 아내는 버티다 못해 두 아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돌아갔고 이중섭 역시 일본으로 갔다가 홀로 귀국한다. "형제들끼리 전쟁하고 있는데 어디 피란을 가겠는가 이거였지." (친구 김병기 화백)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커질수록 가난의 창이 몸을 찌를수록, 그는 그림을 멈추지 않았다. 구상의 회고다. "부두노동을 하다가도 그렸고, 다방 한구석에 웅크리고 앉아서도 그렸고, 캔버스가 없으면 합판이나 담배종이에 그렸고 물감과 붓이 없으면 못이나 연필로 그렸고....외로와도 그렸고 슬퍼도 그렸다....." 그렇게 그린 그림들을 모아서 그는 1955년 미도파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연다. 거기에 그는 은박지에 그린 그림, 유화, 소묘 등을 전시하여 호평을 받는데 난데없는 북한 문화부같은 남한 당국의 개입을 받는다. 가족을 생각하며 그린 그림들이 죄 나체화였는데 이는 '풍기문란'이니 철거하라는 것이었다.

이 사건은 이중섭에게 결정타였다. 발밑이 무너진다는 것은 이럴 때 쓰는 말일 게다. 그런 그에게 정신분열증과 거식증까지 찾아왔다. 친구 한묵의 회고는 참담하기까지 하다. "대구에 있던 중섭이를 시인 구상이 데리고 올라왔을 때 깜짝 놀랐어요. 통 먹지도 않고 사람도 몰라보고..... 육군병원에 입원을 시켰는데 거기선 사람을 묶어놓고 때려가면서 먹이는 거예요. 놀라서 다른 병원으로 옮겼는데 거기서는..... 전기찜질을 당했다더군요."

그리고 첫 개인전이 열린 1년 뒤 1956년 9월 6일 한국이 낳은 천재화가이자 남한과 북한당국이 모두 버려 버린 이중섭이 죽었다.